1995년 국립광주박물관의 신창동 저습지 발굴조사 모습.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복합 농경 유적’, ‘2천년 전의 타임캡슐’, ‘잠에서 깨어난 농촌’…. 모두 사적 제375호 광주 신창동 유적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이다. 주거 영역, 무덤 영역, 농경 영역, 토기 가마 등으로 구성된 마을 하나가 통째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문자 기록물이 없던 시절의 신창동, 나아가 광주의 옛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가 궁금하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유적이다. 특히 저습지에서 발굴된 두터운 벼껍질 퇴적층과 다종다양한 유물들은 전국의 수많은 초기철기시대 유적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을 국립광주박물관이 1992년부터 2014년까지 장장 1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해왔다. 무엇이 신창동 유적을 특별하게 하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신창동 저습지의 토층 모습.

▶신창동 유적의 옛 풍경은?
신창동 유적은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 위치한다.

영산강의 서쪽 강변에 있는 월봉산(해발 98.6m)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구릉들과 그 남쪽의 저습지를 포함한다. 호남고속도로가 유적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며, 유적의 남쪽에는 현재 광주보건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지형은 해발 30m 내외의 야트막한 4곳의 구릉과, 영산강 가까이의 충적지 그리고 높이가 더 낮은 저습지로 이뤄졌다.

박물관의 조사 결과, 가장 서쪽의 첫 번째 구릉에서는 무덤 공간을, 두 번째 구릉에서는 토기 가마와 밭을, 두 번째 구릉과 세 번째 구릉 사이에서는 저습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두 번째와 네 번째 구릉에서는 주거지의 흔적을 발견했다. 높은 곳에는 마을이, 낮은 곳에는 밭이, 더 낮은 곳에는 습지와 논이 있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농촌의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출토된 현악기(왼쪽)와 추정복원 모습.

▶목재 유물 보고(寶庫), 신창동 저습지
저습지는 저지대로서 늘 지하수가 차 있는 곳을 의미한다. 목재와 같이 부식에 취약한 유물이라도 바다나 호수와 같이 대기 중의 산소와 분리된 공간 또는 사막과 같이 수분이 거의 없는 여건에서는 오랫동안 썩지 않는다.

저습지는 그중 전자의 환경에 가깝기 때문에 물경 2천년의 시간 동안 신창동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온전히 품어낼 수 있었다.

저습지에는 홍수로 운반돼 온 모래와 점토, 볏짚과 벼껍질(왕겨), 나무와 나뭇잎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리고 칼과 활 등의 무기류, 괭이 낫 따비 등의 농기구와 공구류, 칠기 절판 등의 그릇류, 발화구 신발골 등의 생활용품, 바디 실감개 등 옷을 만드는 도구들, 바퀴통, 가로걸이대 등 수레의 부속품, 현악기 북 등의 악기류, 문짝 기둥과 같은 식량 저장용 고상건물의 부재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목기가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세계 최대 벼 생산량…윤택한 생활 흔적
저습지에는 벼껍질이 최대 155㎝ 두께로 쌓여 있었고, 벼껍질 퇴적층의 평면적은 200㎡였다. 보고자에 의하면, 벼껍질의 비중을 바탕으로 계산한 탈곡 전 벼의 무게는 500톤에 달했을 것이라고 한다.

신창동보다 앞선, 지금으로부터 약 8천년 전의 농경유적인 중국 절강성 하모도(河姆度) 유적에서는 두께 70㎝에 약 100t 가량의 벼껍질이 발견됐을 뿐이니, 신창동 유적은 동북아시아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벼농사 유적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충적지대에서는 밭에 벼를 재배한 흔적도 발견됐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밭벼(陸稻) 자료다. 저습지에서 출토된 괭이와 따비 등 땅 파는 도구, 낫과 절구공이 등 수확 및 곡물 가공용 도구는 농경사회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이밖에 신창동 옛사람들은 벼농사뿐만이 아니라 조 밀 들깨 오이 삼과 같은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했다. 그리고 산딸기 머루 도토리 다래 밤을 비롯한 열매와 종자를 채집하고, 소 닭을 사육했다. 또 맷돼지 사슴 꿩 오리 기러기를 사냥하고 잉어 가물치 등의 물고기와 말조개 우렁이 다슬기 재첩 등 조개류를 잡기도 했다.


▶‘나무칼’과 ‘칼집’에 담긴 의미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2천년 전 무렵(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사람들은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칼과 화살을 무기로 삼았다. 그 시절에 집단 간 전쟁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사냥을 하거나, 독점적이고 한정된 자원(농경지, 잉여 식량, 인명 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기가 쓰였을 것이다. 무기는 살상력이 뛰어날수록 정교한 가공 작업이 수반됐기 때문에 모두가 가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무기는 소유한 사람의 권위를 시각화하는 물품이기도 했다. 즉 싸우기 위해서도,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무기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기의 물리적 위력을 생략하고 권위적 효능만 극대화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신창동 유적 저습지에서 수습한 청동칼을 모방해 만든 나무칼과 칼집 들이다.

특히 사람들의 시선에 늘 노출되었을 칼집은 빈틈없이 옻칠을 하고 금속판으로 고정하는 등, 청동칼집에 버금갈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왜 신창동 옛사람들은 살상력 없이 권위만 남긴 나무칼을 정성스레 만들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집단 내외부의 갈등을 폭력이 아니라 의례와 같은 사회적 절차로 해소하려는 노력은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신창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점뼈.

▶풍요의 경과, 의례와 美의식
청동기-초기철기시대, 농사 기술이 점차 발달하고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자 농업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고 마을도 커져갔다. 사람들은 생존에 대한 걱정을 덜고 더 먼 미래를 계획하거나 이상적 가치를 그릴 수 있게 됐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갔다.

물론 자연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거나 감사드리는 행위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해주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한 신창동 옛사람들은 맷돼지나 사슴의 견갑골로 점을 쳤다. 그들은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질 때 생기는 흔적으로 길흉화복을 짐작했다. 아마도 농사의 풍흉을 가리거나 마을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이러한 의례를 치렀을 것이다.

그들은 현악기와 북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인 신창동의 현악기는 벚나무 원목을 세로로 잘라 만든 것으로서, 현 고정부와 탄음부 그리고 현미부로 이뤄졌다. 몸체는 절반 정도만이 남아있지만 원래 현의 숫자는 10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북은 바닥이 좁고 아가리가 넓은 사발 모양이며 겉면에 옻칠이 돼 있다. 아가리 부분에는 4.5-6㎝ 간격으로 구멍이 배열됐는데, 천이나 가죽을 덮은 뒤 꿰었던 자국으로 본다.

이러한 악기들은 익숙한 자연의 소리가 아닌 인공의 소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단호하게 울리는 현의 소리, 심장 박동과 조응하는 북의 소리, 맑고 시원한 청동의 소리 등은 신창동 옛사람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시시때때로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은 신창동 옛사람들이 초월적인 존재와 소통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경환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신창동 유적과 ‘광주 사람들’
이렇듯 삶을 윤택하게 가꾸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아름다움을 이해했던 신창동 옛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오늘날의 광주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얼마 전부터 급작스레 세상을 휩쓸기 시작한 병마에 걸린 대구의 시민들을 넉넉한 품으로 받아 안았던 것처럼, 타인의 어려움을 자기 일과 같이 보살피는 광주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결은 2천년 전 신창동 옛사람들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닐까. 그들의 손때 묻은 애장품들과, 지면으로 다 소개하지 못한 신창동 유적의 또 다른 이야기들은 오늘도 국립광주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다시 맞이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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