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어둠에 안긴
세상은
까맣게 비어있다

이른 아침, 이슬 한 방울에
마음을 씻는 풀잎들이 미소처럼
세상은 환하게 비어있다

자잘한 이야기로
말을 건네는 이웃들과
풋내 나는 과일처럼
싱그럽게 속살거리며 시작되는 하루에
깊은 그늘은 사라졌다

비움과 채워짐
그 속에
내가 있다

팅 빈 고요는
맑게 채움이다

-평 설-
손덕순 님의 시 ‘텅 빈 고요’에서의 시적 화자는 비어 있음의 세상을 바라본다. 시적 화자는 비움과 채움으로 이어지는 삶의 길에 서 있다. 밤의 헐렁한 어둠이 비움이요, 이슬 맺힌 아침도 환한 비움이라고 말한다. 해종일 힘들었던 하룻길을 밤의 등에 기대며 비운다. 간혹 어둠 속에서 무릎을 웅크리며 견뎌야 하는 아픔이 있더라도, 밤의 품에 안기며 아픔을 비운다. 그러기에 ‘늦은 밤 어둠에 안긴/ 세상은/ 까맣게 비어 있’다. 그런 깨달음에서 바라본 이슬 맺힌 아침은 더더욱 환한 비움으로 다가온다. 저 맑고 투명한 신의 눈망울 같은 이슬에 마음을 씻었으니, 어찌 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시작되는 하루에 그늘 한 자락 머물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시적 화자는 ‘텅 빈 고요는/ 맑게 채움이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움과 채움은 상반된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너와 내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였듯, 비움과 채움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이런 깨달음에 이른 시적 화자가 부럽다. 이 세상에서 텅 빈 고요에 다다를 수 있어서, 그리하여 맑은 채움의 세계에 머물 수 있어서, 마냥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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