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환상여행을 떠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그러한 여행을 즐겼다. 혼자서 그렇게 훌쩍 일상(日常)에서 벗어나곤 했다. 몸은 현실에 두고서, 육신을 벗어난 내 영혼이 홀로 떠나는 그러한 여행을 나는 환상여행이라 부른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꽤 넓은 별도의 사무실을 사용했다. 하루 종일 혼자 근무하다 보면 더러 무료함을 느낄 때도 없지 않았다. 물론 아침 · 저녁 직원들과 회의를 하지만, 대부분은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꽃을 피운 몇 개의 난분(蘭盆)이 답답함으로, 오히려 애처롭게 여겨지는 순간 나는 육체의 문을 활짝 열고 갇혔던 마음을 멀리 떠나보내곤 했다. 하여, 흡사 우주인들이 우주에서 유영(遊泳)하듯 내 영혼이 그 넓은 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의자에 앉아 내 육신의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공기, 그 미세한 입자(粒子)들이 어지럽게 흘러 다니는 모습, 그리고 그들이 한데 뭉쳐 거대한 덩어리로 변해 달려들라치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실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 환상여행은 겨울철이 언제나 더 정겹게 다가온다. 함박눈이 내리는 시골마을, 볏짚으로 이은 지붕, 그리고 길게 둘러쌓은 돌담에, 사립문이 배경을 이룬다. 그러한 밤이면 촛불을 밝히고, 그 불빛이 미치는 곳, 그만큼 어둠이 물러간 그 빈 공간에 함박눈이 사각거리며 내리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다. 집 뒤 대나무 밭, 바람 소리가 말(馬) 달리듯 하는 그곳은 남 몰래 가슴앓이를 하는, 내 마음의 고향이자 영혼의 안식처 구실을 한다.

가을의 환상여행은 에트랑제의 삶이다. 오랫동안 고향 집을 떠났던 방랑자의 귀가(歸家) 길로 막을 내린다. 덥수룩한 수염, 야윈 모습의 방랑자가 방황을 끝내고, 아스라한 추억의 한 자락을 붙들고, 지친 걸음걸이로 사립문을 밀치고 집에 들어서는 모습의 에트랑제....

여름철, 내 삶에 독(毒)한 회의(懷疑)를 느끼며 울적할 때는 슬픔의 바다에 비애(悲哀)의 배를 띄우기도 한다. 절대 고독(絶對 孤獨)의 돛을 바람에 맡기며, 슬픔이 파도치는 바다를 건너 피안(彼岸)의 세계로 향하면서 느껴야 되는 좌절도 함께 경험하는 그러한 여행.

비애와 슬픔(이를 통틀어 비극이라 치자)은 때로는 사람의 영혼을 정화(淨化·카타르시스)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봄철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노란 개나리꽃, 봉선화, 채송화가 가득 핀, 그러한 고향 집 꽃밭에서 노는 꿈을 꾸는 환상여행이다.

그렇게 사계절 따라 환상의 여행을 즐기며, 사각형으로 한계 지어진 사무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흡사 중국 전설, 꿈을 먹고산다는 맥(貊)처럼, 그 시절 나는 환상여행이라는 꿈을 먹고 사는 에트랑제였나보다.

세월이 흘러간 지금, 이러한 환상여행, 그 여운(餘韻)은 어둠의 장막이 내리면 때때로 소롯이 고개를 쳐들면서, 아침 호수의 물안개처럼 내 의식의 저편에서 피어나곤 한다.

<김용옥 약력>
▲ 시인, 수필가, 광주대 겸임교수 역임
▲ 언론중재위 운영위원 겸 광주중재부 중재위원
▲ 성옥문화상·제 43회 전남도 문화상 수상
▲ 저서 : ‘마음의 오선지에 그린 사계절의 서정’ 등 7권

-평 설-

평설=박덕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전남대 교수 역임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

김용옥 님의 수필 ‘환상여행(幻想旅行)’에서의 서술자는 직장 내에서 별도의 사무실을 쓰고 있는 직장인이다. 그는 혼자 근무하다 훌쩍 환상여행을 떠나곤 한다. 겨울철 환상여행은 고향집으로 떠나는 추억 여행이다. 이제는 색이 바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유년의 그 시절로 떠나는 여행이다. 사립문 열리는 소리에 봉쇄된 유년의 기억이 골목길로 뛰어나왔을 것이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골목과 골목을 내달렸을 웃음소리를 만났을 것이다. 유년의 뼈와 살을 채워 주었던 함박눈을 맞으며 여행했을 것이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직원들을 만나러 가는 걸음걸이도 사각거리는 함박눈을 밟듯 경쾌했을 것이다. 가을날의 환상여행은 방랑자의 귀갓길로 사립문을 밀치며 들어서고, 여름에는 슬픔의 바다에 비애의 배를 띄우고, 봄에는 동심을 고향 꽃밭으로 보내 노닐다 온다. 이처럼 사계절 내내 환상여행을 즐기며 사무실의 답답함을 잠시나마 해소한다. 서술자는 순간 이동처럼 짧은 여행을 통해서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을 줄 안다. 그 마음의 여유에 사색의 의미 방울이 곁들여져 좋은 수필을 낳게 한 것은 아닐까. 이 수필은 내면으로의 여행이기에 나를 이끄는 손을 잡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마치 한 편의 단편 영화 같은 수필이라서, 독특하고 멋지다. 바쁜 일상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 서술자가 멋지다. 우리도 한 번씩 내면으로의 여행, 그 환상여행을 하며 나 자신을 만나 새롭게 눈뜰 필요가 있다. 이런 수필이 우리 곁에 있어, 살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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