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날도 미리 계획된 일도 아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꼭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봄날의 벚꽃, 개나리, 진달래 꽃잔치는 끝났다. 햇빛과 바람은 산천을 기웃대기에 바쁜 어느 날, 그저 좋은 날씨가 불러냈다면 맞는 말이다.

나주호를 지척에 둔 산자락 끝 외진 길에 서 있다. 조용하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진공 같은 세상에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우거진 숲이다. 하늘을 본다. 구름이 수채화 한 폭으로 멈춰있다.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세상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고도로 정제된 공간의 중심. 오감의 촉수를 느슨하게 풀어놓고 한껏 여유를 부린다. 작은 벌레 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려나 귀를 열어놓고, 채도 명도를 달리한 여러 초록색의 발현을 탐미하며 촘촘한 그물망 시선으로 산자락을 엮어간다.

그러다 바라본 건너편 산자락 소나무 숲에서 솜사탕 풀어헤치듯이, 서늘한 가을날 아침 밀려오는 안개 바구니 터뜨리듯이 번진다. 뭘까. 밤낮의 기온 차이로 생기는 안개라기에는 엷고 은은하다. 연노랑 빛깔의 그 무엇이 시간 차이 없이 불꽃놀이의 폭죽을 터트리듯 소리 없이 터지며 무리를 이루어 바람 따라 흐른다. 눈길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아-아- 신음만 냈다. 깊은 산골 골짜기에서 함성을 지르면 메아리가 울려 퍼지듯이 숲은 일제히 연노랑 안개를 쏟아낸다. 옆에서 또 반대쪽에서 이쪽저쪽 산에서, 호수 건너 맞은편 산에서도 순식간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산 전체가 연노랑 안개로 덮였다. 나도 산도 온통 세상이 혼미하다. 그대로 숨을 멈추고 혼절하고 만 봄날의 산. 첫 입맞춤이 그러할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지 산들이 일제히 엷은 장막 뒤로 몸을 숨긴다. 소리 없는 합창. 소나무의 꽃가루. 송화가 공연하는 군무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난 뒤 산의 모습은 또렷해지고 향연은 끝났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아름답다고 한다. 세상 만물은 사랑을 색으로 소리로 맛으로 향기로 행동으로 느낌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울고 웃고 목매는 사랑. 세상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무생물도 사랑으로 존재한다. 사랑은 어울림이다. 집안의 가구들도 도시를 이루는 건물도 서로 어울려야 아름답다. 색깔과 색깔에 보색이 있는 것도 사랑이리라. 손 뻗어 닿아야만 사랑일까. 사랑은 마음으로 느낌으로 생각으로 꿈속에서도 존재한다. 사랑에는 시공간의 경계가 없다. 혼자 있어도 마주하지 않아도 항상 같이 있다. 외로움도 슬픔도 미움까지도 사랑이 없다면 가식에 불과한 것.

산과 산이 마주하거나 나란히 있거나 산과 강이 서로 껴안고 구불구불 돌아가거나 눈을 맞추며 소리를 경청하고 떨림으로 속삭임으로 느낌으로 감각으로 서로 소통한다. 능선과 골짜기가 봉우리와 봉우리가 한데 어울려 이어주고 손잡아주는 믿음이 사랑 아닐까.

숲속으로 들어섰다. 옷깃 스치듯 들숨 날숨에 숲이 들썩인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보니 창호지 바른 봉창에 문구멍 내놓듯 작은 조각들이 있다. 숲이 숨을 쉴 수 있는 숨길이고 하늘이 숲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다. 숲과 하늘의 길이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가지와 가지가 손을 잡고 속삭이며 잎과 잎이 얼굴을 마주하고 살랑거린다. 그것은 사랑의 몸짓이어라. 봄날 숲에 가면 사랑을 만난다.

<고병옥 약력>
▲창작수필 등단 (1995년)
▲광주여류수필문학회장 역임
▲광주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가상’ 수상
▲수필집 : ‘여울물소리’, ‘허수아비’

평설=박덕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전남대 교수 역임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

<평설=박덕은 문학평론가>

고병옥 님의 수필 ‘봄날 애愛’에서의 서술자는 어느 날 나주호 가까이에 있는 산자락 끝 외진 길에 서 있다. 그때 뭔가가 번진다. 연노랑 빛깔이 폭죽 터뜨리듯 소리 없이 흐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 전체가 연노랑 안개로 덮인다. 알고 보니, 송홧가루 향연이었다. 여기서 서술자는 사랑을 발견한다. 그 사랑의 느낌을 ‘그대로 숨을 멈추고 혼절하고 만 봄날의 산. 첫 입맞춤이 그러할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지 산들이 일제히 엷은 장막 뒤로 몸을 숨긴다’라고 말하고 있다. 멋진 표현이다. 혼절, 입맞춤, 화끈 달아오름을 통해서 사랑에 빠진 느낌이 그대로 전달된다. 송홧가루 향연이라는 사랑이 짜릿하고 황홀하게 다가온다. 사랑의 감옥이 이와 같다면 기꺼이 그 감옥으로 수인 번호를 달고 들어가고 싶다. 서술자는 ‘봄날 애’를 통해서 당신의 봄날 사랑은 안녕한지 묻고 있는 듯하다. 만물은 색으로 소리로 향기로 사랑을 표현한다. 손 뻗어 닿아야만 사랑이 아니다. 산과 산, 산과 강, 능선과 골짜기, 봉우리와 봉우리, 한데 어울려 이어주고 손 잡아 주는 믿음, 그게 사랑이다. 숲속의 살랑거림, 그것도 사랑의 몸짓이다. 강렬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수필, 읽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수필, 매력적이다. 한 단계 성숙의 세계로 안내하는 수필, 이런 수필이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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