絶句(절구) / 백호 임제
깊은 밤 숲 속 절에서 잠을 잤더니
구름이 내려와서 풀 옷을 적시었네
돌문에 늦잠 자던 새 깜짝 놀라 날아가네.
半夜林僧宿 重雲濕草依
반야림승숙 중운습초의
岩扉開晩日 棲鳥始驚飛
암비개만일 서조시경비

시인의 시상들은 아마 몇 만 리쯤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타래로 얽혀놓으면 한 섬이요, 지게 짊어지면 거뜬히 한 짐은 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타래의 짐이 많고 무거워 ‘무제’(無題)라든지, ‘우음’(偶吟)이랄지, ‘절구’(絶句)랄지 인색한 제목을 붙이는 수가 더러 있다. 시상은 쏟아져 나오는데 시제를 추스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깊은 밤 숲 속 절에서 잠을 잤더니, 겹구름이 내려와 풀 옷을 가만히 적시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둥지 안에 늦잠 자던 새가 비로소 놀라 날아가네’(絶句)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로 조선 중기 문신, 시인이다. 벼슬에 있으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파직당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기생 한우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게 알려지는 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깊은 밤 숲 속 절에서 잠을 잤더니 / 겹구름이 내려와 풀 옷을 가만히 적시었군 그래 // 날이 저문 느지막이 슬그머니 돌문을 열어보았더니 / 둥지 안에 늦잠 자던 새가 비로소 놀라 날아가네’라는 한 덩어리 시상이다.

위 시제는 ‘절구 한 수를 지으며’로 번역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원과 가능성을 준다. 또한 시심을 주고, 시상을 연결시켜 준다. 특히 산과 물을 향해 눈과 귀를 조금이라도 더 돌려놓아야겠다는 마음이 솟아나게 만든다. 이렇듯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은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함을 줬다. 그래서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는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포근한 산이 감싸고 있는 절에서 잠을 자면서 겹구름이라는 시상 주머니를 만지면서 시낭의 주머니는 가득 차 있는 살풋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깊은 밤 숲 속 절에서 잠을 잤더니만, 겹구름 한 줌이 내려와 풀 옷을 가볍게 적셨다고 했다. 겹구름이 내려 왔겠는가마는 구름이 이슬을 내리게 해 풀잎을 적시면서 내려왔다는 시적인 상품 하나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풀 옷으로 갈아입었다면 자연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후정을 감싸지 못했다. 날이 저문 느지막이 슬그머니 돌문을 열어봤더니만, 둥지 안에 늦잠 자던 새가 비로소 놀라 날아갔다고 했다. 둥지 안에서는 잠자던 새가 안타까워 후정을 감싸는데 조금은 인색했을 것이다.

※한자와 어구

半夜: 한 밤중. 밤의 절반 아니면 한 밤중이다. 林僧宿: 숲 속 절집. 곧 스님이 자는 숙소. 重雲: 겹구름. 濕草依: 풀 옷이 젖어있다. // 岩扉: 돌문. 돌무더기의 한 개를 열어젖히다. 開: 열어보다. 晩日: 늦은 날. 날이 저물어. 棲鳥: 새가 깃들이다. 始: 비로소. 驚飛: (새가) 놀라 날아가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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