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0(일)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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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격은 인류에게 선하게 작용한다거나 찬양받을 만하다는 증거로서의 자격이 아니다. 강력한 힘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압살하고 살아남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선하고 찬양받을 만한 이야기만 살아남았다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다. 악화(惡貨)에 해당하는 이야기들만이 대부분 살아남았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잔인해지고 추악해졌고, 당연히 살아남은 인간들 대부분은 그 이야기에 전염된 병자들이자 추종자들이다.
인류사의 숱한 비극적 사건들이 있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마녀사냥, 포그롬, 홀로코스트, 문화대혁명,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유고 내전, 이라크전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음험한 유령으로 곳곳을 훑으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커다란 비극은 결코 이야기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광기와 악의로 쓰인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그만한 동력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선의는 미풍을 만들어내고, 악의는 태풍을 만들어낸다.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를 남긴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문화와 제국주의』에 이렇게 썼다. “국가 그 자체는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하는 힘, 또는 타인 이야기의 형성이나 출현을 먹는 힘이야말로 문화에서도 제국주의에서도 지극히 중요하고, 문화와 제국주의를 연결하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 존재하는 크고 작은 모든 주체는 이야기다. 추상적 존재일수록 더욱더 이야기다.
이야기는 문화콘텐츠를 만들려는 이들이 사랑하는 낭만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과 상상력이 투사된 결과물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이야기를 만들려 하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 상상력도 사랑스럽기만 한 단어가 아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장치일 뿐이다. 이야기도 상상력도 선악을 가지지 않았다. AI처럼 일말의 주저도 없이 앞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할 뿐이다.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다. 반성과 제어는 거울이 하는 것이 아니다. 거울 앞에 선 인간이 해야 한다.
이야기의 세계는 벤다이어그램의 세계다. 이야기들의 원은 수를 셀 수 없다. 한 사람마다 하나 이상의 이야기 원을 가지고 있다. 크고 작은 이야기의 원이 겹치고 겹친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 안에 들어있기도 하고, 작은 이야기 안에 큰 이야기가 들어있을 때도 있다. 물리 법칙은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법칙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세계는 평면적인 이차원의 벤다이어그램이 아니다. 시각적으로는 3차원이지만, 정신적인 측면까지를 고려하면 4차원이다. 비등하게 겹치지도 않는다. 그런 상태는 이야기를 낳은 힘과 방향, 지속성이 동등할 때만 가능한데, 어느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와 그런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
작은 방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일부터 이야기 세계의 작동이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관심을 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압도한다는 의미다.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좀 더 큰 판에서는 이야기가 쌍방의 대결이 아니고, 소수의 대결이 된다. 정치적 주인공들이 그렇게 결정되고, 트럼프 같은 인물의 탄생이 그렇게 결정된다.
문학과 음악, 미술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대부분 작은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문학과 예술로 세계를 크게 움직이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 미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 독특한 상상력의 작은 미풍에 해당할 뿐이다. 어쩌면 문학과 예술은 이야기가 가진 여러 취향의 성격들 가운데 매력적인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무수한 이야기가 태어나고 몇 개의 이야기만이 살아남는 과정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세계의 풍경은 청자(聽者)들이 어떤 이야기를 택했는가로 드러날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방식에서 달라졌으면 싶지만, 기대대로 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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