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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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굴곡마다 혜안·리더십 갖춰 시대정신 선도
[전라도 정도 1천년] 제 2부 천년의 인물-(1)프롤로그
왕인박사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인물 ‘걸출’
시대를 이끈 농민운동가·정치인 등 ‘미래 좌표’

  • 입력날짜 : 2017. 01.01. 19:11
오는 2018년이면 전라도 정도 1천년이 된다. 전라도는 그동안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 중심에는 지역을 빛낸 인물들이 있었다. 사진 왼쪽부터 왕인 박사와 그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재현 장면, 김대중 전 대통령(위)·해상왕 장보고의 동상.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글자를 조합해 탄생한 전라도는 지금으로부터 999년전인 고려 현종 9년(1018)에 명명됐다. 따라서 오는 2018년 전라도가 정해진 지 1천년이 되는 셈이다. 전라도는 지난 999년동안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 역사의 굴곡에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선각자들의 눈부신 역량과 혜안 및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카문학의 주역 왕인박사와 해상왕 장보고, 이상국가 실현을 꿈꾼 실학자 유형원, 인동초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전라도에는 걸출한 인물이 당시대의 험난한 역사를 촘촘하게 엮어갔다. 본란에서는 오는 2018년 전라도 정도 1천년을 앞두고 역사속의 호남사람 행적을 찾아 오늘날의 좌표로 찾아보고자 한다./편집자 註

전라도의 한 축인 전주는 통일신라시대 9주중의 하나로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전주는 이후 고려 태조 19년(936)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36년간 존속했다.

나주는 본래 백제 땅이었다. 이후 통일신라때 복속됐는데 신라 말에는 후백제 땅이 됐다. 이후 왕건의 활약으로 궁예에게 넘어왔다. 나주는 본래 큰 고을이 아니었다. 그러다 궁예에 의해 나주로 승격했다. 즉 ‘군인(郡人)’의 협조로 궁예의 수중에 들어갔다. ‘군인(郡人)’이란 뜻은 ‘군 전체 사람’이란 뜻 보다는 ‘군의 민심을 대변한 대표자’라는 의미다.

‘나주’라는 지명이 탄생하고 왕건이 나주를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은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이 나총례를 비롯한 나주 나씨(羅州 羅氏)였다는 설도 있다. 나주의 처음 글자인 나(羅)를 성으로 삼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 아스카문화의 주역 왕인

왕인은 영암군 군소면 구림리에서 태어났다.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화려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중심에는 왕인박사가 있다.

왕인박사는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됐다. 경서에 통달했던 왕인은 왕의 요청으로 군신들에게도 경서와 역사를 가르쳤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왕인을 기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1973년부터 현창회가 구성되고, 1987년 영암에 왕인박사 유적지가 조성됐다.

해상왕 장보고는 우리민족이 바다로 뻗어야 번영할 수 있다는 진실을 1천100년 전 증명한 인물이다. 청년기에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 서주 무령군에서 복무하다 장교가 됐다. 828년 중국에서 귀국한 후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황해의 무역로롤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 등을 주창했다.

▲정극인·김인후·기대승 등 명망가도

장성 황룡면 맥동마을 출신 하서 김인후는 역사적으로 도학과 절의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인물로 꼽힌다. 그가 남긴 1천600수의 시는 준엄한 언어로 인간 내부에 잠적된 영혼의 육신을 회생시키는가 하면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의 훈육으로 존재의 깊은 심연을 느끼게 한다.

전라도의 고봉 기대승은 조선 중종때 경상도의 퇴계 이황과 비견됐다. 퇴계는 고봉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고봉이 자신보다 학덕이 높음을 칭송했다고 한다.

광산구 임곡동에서 태어난 기대승은 ‘논사록’에서 군주의 조건으로 ‘임금이라 할 지라도 인격을 닦기 위해서는 치심과 수신을 학문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강 정철은 서울 상위동에서 태어났지만 10세때 을사사화때 매형이 피살되고 아버지가 유배되는등 가계가 몰락하면서 16세가 돼서야 공부를 시작했는데 부친이 석방돼 담양 창평으로 내려왔다.

창평에서 수련을 거친 뒤 26세 때 진사시에 일등하고 45살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관동별곡 등을 지었고, 1581년 노수신에 대한 응지를 지은 것이 화근이 돼 관직에서 밀려 창평에 돌아왔다. 그가 남긴 가사문학의 정신은 남도정신을 배우고 익혔던 청년기의 영향이 컸다는 점에서 오늘날 광주정신과도 맥을 같이 한다.

고선 윤선도는 시조시인 1인자로 꼽힌다. 그는 16세기를 풍미한 문학인이요 원림문학의 전통을 형성한 조경인이다.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보길도와 해남 현산에서 다양한 문학활동을 했다. 해남 윤씨의 16대손이며, 확고한 자기주관을 설정하고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성인이다.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양주에서 1762년 태어났지만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되면서 백성의 고난과 설움을 직접 체험하고 개선해야할 내용을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에 담았다.

그는 자기의 경학 정립에서 시대를 철저히 비판했고, 비판을 통해 개혁을 도출했다. 지금도 다산 사상의 연구모임이 활발하다.

정봉준은 전북 고부군 출신으로 조선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다.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계속되자 동지 20여명을 규합해 사발통문을 작성해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이듬해 정월 1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이후 근대에서는 1914년에 태어난 광주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정율성과 1924년생으로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인 남긴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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