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5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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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회복·미래발전 기회 삼아야
[전라도 정도 1천년]
김종일 광주전남연구원 미래연구실장

  • 입력날짜 : 2017. 01.01. 19:11
오는 2018년은 ‘전라도’라는 명칭이 정해진 지 1천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고려의 8대 임금이었던 현종은 전국을 5개 도(道)와 양계(兩界)로 나누고, 오늘날 전북지역인 강남도(江南道)와 광주와 전남지역인 해양도(海陽道)를 합쳐 전라도라 칭했다. 현종 재위 9년 즉 1018년의 일이었다. 전라도라는 이름은 관내의 중심도시인 전주의 ‘전(全)’자와 나주의 ‘나(羅)’를 조합한 것이다. 전국 주요 광역 도의 현재 명칭 사용연도를 보면, 경상도는 1314년, 충청도는 1356년, 강원도는 1395년, 경기도는 1414년이었다. 고려의 5도 중에서 전라도의 명칭이 가장 먼저 생겼고,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명칭과 영역의 큰 변화가 없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라도가 다른 도에 비해 먼저 이름이 붙여진 배경은 무엇일까?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전라도 곳곳에 2만여기의 고인돌유적을 남겼다. 고대 마한세력은 백제에 복속된 이후 6세기 중반까지 영산강을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 서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했다. 당시 영산강의 물길과 서남해의 바닷길은 중국, 일본 등과의 문명교류의 통로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실크로드였다. 선사와 고대사회 이래 교통의 요충으로 발달했던 나주는 고려 건국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현종은 1011년에 거란의 침략을 피해 나주까지 피신했다가 개경으로 환궁한 적이 있다. 이처럼 나주는 고려 건국 이후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여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전라도는 조선시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보유하고, 국가 재정의 50% 가까이를 담당했던 경제의 중심지였다. 도자기, 판소리, 남종화, 가사문학 등을 탄생시킨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호남의병, 동학농민혁명, 일제강점기의 의병,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주화운동 등 국난의 위기 때마다 분연히 일어선 호국의 거점이고 민주의 성지였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아직도 전라도를 폄하하는 악플이 심각하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집단적 혐오증을 유발시켜 전라도의 자긍심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전라도 천년을 맞은 시점에 전라도민은 물론이고 출향인과 외지인에게 전라도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려 정체성을 회복하고 국민적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개 시·도민이 함께 참여하는 화합과 상생의 기념행사도 추진돼야 한다. ‘2018 전라도 방문의 해’ 지정과 기념식 및 문화·예술행사 개최를 통해 출향인의 고향 방문과 관광객을 유치하는 전략도 병행돼야 한다.

기념사업이 과거와 현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라도 천년을 산업사회시대의 낙후와 소외의 오랜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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