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0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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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천년] “군왕도 왕이기 전에 인격 갖춘 성인 돼야”
제2부 천년의 인물-(5)고봉 기대승
광주출신 조선 중기 성리학자…퇴계 이황과 교류
민본위민·민중이 고루 잘 사는 복지사회구현 추구
임금이라 할지라도 ‘치심·수신’ 학문 근간 삼아야
강의 모음집 ‘논사록’ 왕도의 교본으로 각광 받아

  • 입력날짜 : 2017. 03.22. 20:07
고봉 기대승을 모신 광주 광산구 신룡동 월봉서원 전경. 월봉서원 내 빙월당.
기대승은 조선 중기 사림정신에 투철한 경세가로서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경세사상을 대표한 학자였다. 사림정신을 일깨우고 사림의 정치적 이상인 자치주의를 실현하도록 임금에게 일깨웠다. 기대승이 죽은 후 선조의 명에 의해 그가 경연에서 한 강의를 등출(謄出)해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던 ‘논사록(論事錄)’은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과 더불어 조선조 500년 간의 대표적인 왕도의 교본으로 존중됐으며, 조선조를 통틀어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유형원의 ‘반계수록’, 정약용의 ‘경세유표’와 함께 대표적인 경세사상서이라고 할 수 있는 저서다.

기대승(1527-1572)은 사대사화 중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19년 전 광주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조카로, 숙부 기준이 화를 입자 그의 아버지 기진이 서울에서 전라도 광주로 은거하던 중 태어났다.

고봉의 청년시절은 조선이 위태위태했다.

연산군의 폭정이 막 끝나고 중종이 집권하자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가 약관의 나이로 나라를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반대파의 모략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른바 기묘사화다. 이때 조광조와 같이 희생된 사람 중에 기준이라는 사람이 있다. 기준을 잃은 기씨 일가가 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곳이 광산구 임곡이고 바로 기대승의 조상이다.

고봉은 32세에 과거에 응시해 문과의 을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 부정자가 된다. 여기서 퇴계를 만난다.

이때 고봉은 첫 질문으로 ‘바른 선비의 자세’를 물었다. 퇴계는 “자신을 깨끗이 하고 옳은 일만 하면 된다”고 답해 둘의 우정은 시작됐으며, 26년간 지속됐다.

고봉은 임금 곁에서 조선 건국 이래 앓아 온 내부 모순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고봉의 비판의식, 대쪽같은 성품은 그를 결국 외롭게 만들었다.

고봉은 44세때 관직을 버리고 임곡에 서재를 짓고 내려올 결심을 했다. 그러나 선조를 이를 말렸다.

이에 고봉은 선조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군왕의 정서를 소홀히 한다든지, 백성 사랑하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근본이 없는 겁니다. 마음을 함부로 쓰고, 백성이 고루고루 살도록 하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그 왕의 혜택이 밑까지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 나라는 잘 다스려지는 것이며, 백성이 만족하게 되면 군주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함이 있으리까.”

고봉은 짐을 챙겨 한양을 떠났다. 천안에 도착하자 볼기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 살을 베는 아픔을 참고 태안에 도착했다. 선조가 병 소식을 듣고 약을 지어 보냈으나 약이 채 도착하기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이에 선조는 모든 장례비용을 보내 임곡동 너부실에 안치하도록 했다.

평생 의리와 강구를 본분으로 삼은 대 선비, 자신의 장례를 치러준 임금에겐 고집불통 신하였지만 임금을 대하기만 하면 이 말을 되풀이한 깐깐한 관리였다.

“국가의 안위를 항상 옮음에 두십시오. 현명한 임금은 시비를 잘 식별해 올바른 대신을 등용합니다.”

선조는 이러한 엄격한 신하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그가 경연에서 진계한 것을 모두 상고해 등사해 임금의 예람에 대비했다.

그 책이 바로 ‘논사록’이다. 정치·경제·사회·논리의 부정한 학설을 막고 인심을 바로 잡으려는 도가 모두 이 책에 담겨 있다. 읽는 자는 침잠하고 반복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밝게 분별해서 참을 쌓게 하는 힘이 책이다.

고봉이 ‘논사록’에서 사림파 학자들의 최고 이상이었던 덕치주주 실현을 위해 강조한 것은 ‘군주의 조건’이다. 즉 군왕이 군왕이기 이전에 인격을 갖춘 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이라 할지라도 인격을 닦기 위해서는 치심(治心)과 수신(修身)을 학문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먼저 자기를 다스리고 난 후 군주의 통치기준을 백성 즉 민중에 둬야 한다고 했다. 무릇 정치는 민중을 위하려는 민본위민 정치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의 고민과 외침의 결정체는 민중이고 민중이 고루 잘 사는 복지사회구현이었다.

기대승은 경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연은 군주의 자질 함양을 위한 일종의 교육제도다. 경연은 경서를 통해 군주가 현군이 되도록 그 방법을 제시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즉 군주가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는 군주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래서 군주의 교육을 위한 제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필요에 따라 나타난 제도가 바로 경연제도이다.

경연제도는 한대 유학이 관학의 지위를 획득한 후 처음 시작됐으며, 우리나라에는 1116년 고려 예종 때 궁중에 청연각을 둬 아침저녁으로 경서를 강론했다.

기대승은 경연검토관이 돼 첫 경연 때부터 임금의 덕을 강조했다.

“국가의 안위는 재상의 보필여하에 달려 있으며, 군주로서의 성취 여부는 경연관의 진강 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군덕의 성취를 맡는 경연관이나 국가의 안위를 맡는 재상이 모두 막중한 요직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덕이 성취돼야 재상이 현명한가 그렇지 못 한가를 알아차리고 임명하게 될 것인 즉, 경연직이 더욱 요직인 것입니다. 경연청이란 제도를 마련할 때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후에 와서 형식만 갖추고 실적을 올리지 못해서 경연청이 그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임금께서는 성덕이 숙성하시어 의리의 학문이 밝은 터이므로 경연에 자주 참여하시면 성덕이 더욱더 빛날 것입니다.”

기대승의 재정관은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해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적극적 의미의 부국책이 아니라 가렴주구를 금지하고 절약을 통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소극적인 감세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금을 많이 거두는 일에 몰두하면 민생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재물은 비록 모아지지만 백성들이 흩어져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기대승의 경세사상의 본질은 유학본연의 덕치주의적 왕도정치의 이상을 계승해 민본정책을 실현하는 것이며, 그의 경세사상의 특색은 한국적 절의 사림정신을 접목시켜 지식계급인 사대부를 통치의 주체로해 책임정치를 실현하려고 한 점이다.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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