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5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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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1천년]제2부 천년의 인물-(6)제봉 고경명
임진왜란 의병장 맹활약…호남 저항기질 ‘오롯이’
외세침략 대항·민족 주체성 확립 살신성인
조선후기 실학·한일의병·5·18 등 큰 영향

  • 입력날짜 : 2017. 04.10. 20:13
호남의 대표 의병장 충렬공 제봉 고경명 선생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인·의병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의병 7천여명을 모집해 왜군과 싸우다 1592년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사진은 사당인 광주 남구 원산동 포충사./광주매일신문 DB
호남은 불의에 대한 저항의 기질이 남달랐다. 국난을 당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호남의 저항 기질을 오롯이 간직한분 중 한 명이 제봉 고경명이다. 제봉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 조부는 형조좌랑을 역임한 고운이다. 본관은 장흥이고,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됐으며, 1553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공조좌랑으로 기용됐다가 전적·정언을 거쳐 사가독서했다. 1563년 인순왕후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로서 이에 참여했다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돼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기도 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돼 낙향했다.

그는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관료로서 소명과 제소를 반복하면서 역겨운 파란을 견디고 때로는 산바람 강줄기에 온몸을 맡기고 어려운 정치와 사회를 지켜보던 60년 세월을 되짚어 봤다.

고경명 선생의 사당인 광주 남구 원산동 포충사에서 후손들이 임란의병 당시 담양출병도(320㎝×220㎝) 대형 기록화 봉심 행사를 갖는 모습./광주매일신문 DB
그러나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왜적의 진출은 속도가 빨라 4월14일 부산진을 상륙해 5월에는 서울에 입성해 조정이 위기에 처했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이자 고경명은 아들 종후와 인후를 시켜 본주까지 도망쳐 와 있는 군사를 이끌고 수원에 이르러 본주 목사 정윤후에게 붙여주고 돌아오도록 했다. 당시 관군은 후퇴해 흩어지고 한양이 함락돼 선조가 의주로 파천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민심이 흉흉한데다 의병과 관군간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이어서 의병모집이 어려웠다.

고경명은 두 아들을 앞세우고 30여일만에 전라도에서만 6천여명을 모집했다. 곧장 의병군 편대를 정비해 담양을 출발, 전부에 도착,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보냈다.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령이나 관군들은 죽기를 두려워해 도망치기 일쑤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왕을 잔학한 왜적 앞에 내버려 둔단 말인가. 각 읍의 관군, 수령 민중들이여,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함께 목숨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폐부를 찌르고 간담을 울리며, 용기를 불어넣은 이 간절한 호소에 호응한 의병들은 담양을 출발해 태인을 거쳐 전주에 도착, 금산으로 향했다. 고경명의 주력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항간에는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밀려왔다.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 고경명은 당초 계획을 바꿔 금산에 방어전을 치고 유팽로에게 지시해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전서를 보내 합세할 것을 건의했다. 그날 저녁 적병이 잠든 후 용맹스런 30여명을 성 밑에 잠복시킨 뒤 성 밖의 사가를 모두 불태워 서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고경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 서구 풍암동 무궁화동산에 세워진 동상.
이튿날 다시 공격을 시작한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쳐들어 갔으나 관군이 먼저 집중 공격을 받아 무너지니 의병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유팽로가 고경명에게 피할 것을 외쳤지만, 고경명은 둘째 아들 인후와 함께 몸을 감싼 채 최후를 맞았다.

그가 순직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좌찬성에 추증했다. 이후 광주의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됐다. 문집에 ‘제봉집’, 저서에 ‘유서석록’ 등이 있다.

한편, 고경명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키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해 전라좌의병,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적기의병군을 일으켰다. 모두 고경명 휘하 의병들이었다. 고경명의 피가 의병운동에 불을 지펴 호남과 조선땅을 고스란히 지켜낸 것이다.

후학들은 조선조의 도통정맥을 따지면서 기묘사화의 조광조 이후 호남사상의 맥을 이은 이로 고경명을 꼽고 있다. 조광조가 이륙하려다 실패한 인도주의는 고경명에 의해 외세침략에 대항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수용됐으니, 민족 전통성에 대한 실체의 확인이며, 참된 민족정기를 높이는 행동철학이었다.

이런 행동철학은 조선후기의 실학, 한일의병, 5·18민주화운동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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