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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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천년]제2부 천년의 인물-(9)다산 정약용
시대 비판 통해 정치제도·경제정책 개혁안 제시
관료 잘못 지적 ‘이계심 사건’ 무죄 민권의식 강조
백성 고난 삶 체험 ‘목민심서’ 등서 애민정신 표출
강진서 ‘주역상전’ ‘시경’ 등 6경4서·1표2서 완결

  • 입력날짜 : 2017. 06.07. 20:02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강진으로 귀양와 머물면서 10여년동안 생활한 다산초당. 다산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해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로 다산초당을 비롯, 다산박물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다산이 강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강진으로 유배를 온 것이 계기가 됐다. 다산은 1762년 경기도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났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다산의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릴 적 스승은 부친이었다.

10세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다산 정약용의 필첩.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하던 환난시절,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돼 줄곧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시절로 암해어사, 참의, 좌우부승지 등을 거쳤다.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고 23세 때는 서양서적을 구해 읽기도 했다. 이때의 서양서적은 천주교 서적으로 6-7년 동안 다산은 천주학에 매료됐다.

그러나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다산에게 시련이 닥쳤다. 다산의 셋째형인 정약종이 주선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밀입국 시키다가 발각되자 다산까지 오해를 받고 충청도로 유배에 가까운 좌천을 당하고 만다.

얼마 뒤 다시 벼슬길이 열렸으나 반대파의 상소로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임명됐다.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 지방관으로 득의시절의 끝이었다.

제2기는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정조 사후책동 사건으로 체포·투옥됐다 1년 후 포항으로 유배, 다시 강진으로 이배됐다.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문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강진 동문 밖에서 4년 간 거처하면서 고난한 생활을 하던 다산은 1804년 만덕사 소풍 길에서 해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고 집필을 계속한다. 1909년 강진 다산 초당으로 옮겨 1년 반 동아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주역상전’, ‘시경’, ‘상례사전’, ‘춘추’, ‘흠흠신서’ 등 6경4서와 1표2서를 완결했다.

귀양에서 풀린 3기는 회갑 때로 ‘자찬묘지명’을 저술해 자서전적 기록을 남겼다. 이후 총 500여권을 저술했으니 놀라울만한 지성이다.

더군다나 36세 곡산 도호부사 시절의 정치는 놀랍다. 바로 ‘이계심 사건’인데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1천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관아에 쳐들어와 시위를 주동했던 이계심이라는 백성을 무죄 석방한 사건이다.

수령이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백성들이 제 몸의 안일만 꾀하느라 수령의 잘못을 지적해주지 않기 때문이라 판단, 치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항의하는 백성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다산의 민권의식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정신이다. 다산 뿐 아니라 조선 후기 모든 실학자들이 가졌던 기본자세는 바로 비판이다.

다산은 자기의 경학 정립에서 자신이 처했던 시대를 철저히 비판했고, 비판을 통해 개혁이라는 것을 도출해냈다. 개혁이라는 관념 속에서 볼 때 정치제도·경제정책의 개혁 뿐 아니라 정주학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에 섰다.

다산은 유배지에서나 어명을 받들고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백성의 고난과 설움을 직접 느낄 수 있었고 초라한 농가에서 뻗어나는 순박하고 정직한 백성의 이상을 몸으로 체험했다.

이런 경험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체에 걸쳐 사회의 극악한 피폐상을 보다 사실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특히 개선해야 할 사회 전반에 걸친 대책이 생생히 살아 흘렀고 ‘목민심서’, ‘경세유표’에 그 사상을 결집, 애민정신을 표출했다.

다산 동상.
회갑을 맞은 1822년 다산은 인생을 정리한다. 자신의 장지를 정하고, 스스로 묘지명을 짓는다. 별호도 후대를 기약한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사용한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기존 저술에 대한 종합과 문집의 편집으로 나타났다.

다산은 ‘하늘이 자신의 뜻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신의 저서를 불질러버려도 좋다’는 안타까움을 안고 눈을 감았다. 이 말은 후세인들에게 그의 사상을 꼭 구현해 달라는 당부로 들린다. 현재도 다산 사상 연구모임이 활발하게 일어나 다산철학을 되새기는 이들이 많은걸 보면 18세기에 한 다산의 ‘말’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던 정약용은 양반제자 18명과 중인제자 6명이 각각 별도로 그의 아들과 더불어 자기가 경영하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다. 또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만덕사의 스님들은 전등계(傳燈契)를 조직하게 해, 길이 우의를 다지도록 했다.

그는 귀향 이후에도 옛 제자들과 서로 내왕하면서 강진에서 있을 때와 같이 저술활동을 했다./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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