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1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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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누름돌 남은례 수필

  • 입력날짜 : 2019. 02.25. 18:06
해마다 유월엔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때를 놓치는 수가 있어 맘이 바쁘다. 초여름이면 백다다기를 접으로 사다가 오이장아찌를 담근다. 오이가 커서 과육이 통통한 것은 쉬 물러지기 때문에 씨가 크지 않고 모양이 날씬할 때 담가야 오래두고 먹어도 물러지지 않고 아삭거린다. 그러나 장아찌를 담글 때마다 마땅한 누름돌이 없어 아쉽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골목에서 동그랗고 반들거리는 돌을 주워다 썼다.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챙겨왔지만 시나브로 없어지고 이젠 하나만 남았다. 장아찌 담글 때 항아리 속 재료가 떠오르지 못하게 맨 위에 얹어서 지그시 눌러 주어야 하는 요긴한 돌덩이.

채석장에서 깬 듯 각이 반듯한 것보다는 세월의 물살에 닳고 닳아 둥그스름하고 묵직하며 반들반들한 그런 돌덩이를 누름돌로 쓴다. 바닷가 몽돌이 딱 제격인데 요즘은 반출이 금지되어 그림의 떡이다. 하천의 정비 탓인가? 둥글넓적한 돌덩이가 뒹굴던 강가의 자갈밭도 어언 사라졌다. 우리 집 항아리 뼘에 맞는 반들거리고 야무진 돌덩이는 어디에서 구할까. 양파나 깻잎등 해마다 한두 번 담그는 것도 아닌데 어찌 매번 장아찌를 담글 때서야 나는 누름돌을 챙길까. 생각해 보니 내가 평생토록 살림고수가 못 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점이다.

누름돌이 어찌 장아찌 담글 때만 필요하랴. 세월에 닳고 닳아 세파에 흔들림 없고 댕돌 처럼 강직한 존재, 사실 우리네 삶에서도 분명 누름돌 같은 묵직한 훈도가 필요할 때가 있다. 너도 나도 돌개바람에 휩쓸려 일확천금을 노리며 분별없는 혼돈 속에서도 차분한 자제력이 되는 이성적 존재가 바로 누름돌 같은 역할이 아닐까.

지금 집안에선 어른이 또한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인생이란 항로에서 언제나 식구들의 안녕을 위해 온힘 다하여 단단하게 키를 붙들고 있어, 출렁이는 뱃전의 중심을 잡고 있는 묵직한 닻과 같은 어른이란 자리는 참으로 막중한 누름돌인 것이다.

평생토록 남이 모르는 돌도 있다. 여인들 가슴 속에 박힌 오래된 누름돌이다. 늘 자신보다는 엄마의 몫, 아내의 몫으로 살기에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스스로 짓누르고 사는, 못난 자존심도 세월의 풍상에 은결로 다듬어 꾹꾹 누르고 산다. 인생에선 한 줄의 잠언도, 고매한 선인들의 발자취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누름돌로 삼는다.

그동안 나는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도 모르고 버거워만 했다. 그러나 문득 세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 내 인생에 가장 큰 무게로 나를 다독이고 정제 하게 하는 누름돌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나 스스로도 기본을 지키며 원칙대로 사는 것은 무척 힘 드는 일이었다. 해가 갈수록 꾀가 나고 빤한 살림살이에도 좀 더 수월한 게 없나 살피게 된다. 하다못해 누름돌도 마땅한 게 없으면 어설픈 나무젓가락을 적당히 질러 넣고 벽돌 조각을 비닐로 싸서 대충 올려놓기도 한다. 차츰 볼품없게 거충거충 하는 살림새다. 제대로 된 무게로 골고루 눌러지지 않으면 항아리 속의 재료는 옆구리로 불거져 나오고 곰팡이가 슬 것이다. 대게 항아리의 전두리는 좁아서 꼭 맞춤한 돌을 찾기 어렵다. 돌이 채우지 못한 부분을 댓가지로 스크럼 짜 누르거나 군색한 대로 만만한 나무젓가락이라도 주위를 단속해 판판하게 균형을 잡아본다. 참 어설픈 주부의 모습이다.

그 동안 나는 세상만 삐거덕거린다고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도 모르고 힘들어 했다. 자꾸만 어긋나고 비뚤어진 세상일지라도 서로에게 관심으로 다독거리며 사랑도 했기에 서로 서로는 굄돌이 되어 의지하고 살아 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가족을 위해 누름돌로 굄돌로 평생을 살아 온줄 만 알았는데, 별처럼 반짝이던 세 아이의 눈망울이 나의 버팀목이고 굄돌이었다. 모르는 사이 우리 가족은 서로의 굄돌로 기대어 살고 있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균형과 조화로움이 잘 이뤄진 삶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누름돌 주위를 고루고루 단속하는 것처럼 여러모로 빈틈없는 배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주부의 소임 역시 바로 그런 오묘한 조화를 위한 인고의 덕목이 아닐까. 든든하게 갈무리된 묵직한 돌 밑에서 장아찌가 맛있게 익듯이, 가정도 사회도 부실한 리더 아래서는 건강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시절 부모님의 잔소리도 선생님의 훈육도 모두가 우리를 보살피고 다독이던 단단한 누름돌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은 그분들, 이제는 다만 회한이고 그리움일 뿐이다.


<약력> ‘창작수필’ 등단, 창작수필, 광주여류수필회원, 광주문협이사, 광주여류수필회장 역임, 교육부 학부모 교육수기 대상, 검찰청 청소년선도 편지공모 대상, 광주문협 시민백일장 수필 장원, 제14회 전국연극제 시부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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