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4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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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밖 화가들] 귀스타브 카유보트
‘재능과 富’ 겸비한 인상파 동료들의 ‘키다리 아저씨’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 입력날짜 : 2019. 05.09. 18:30
귀스타브 카유보트 作 ‘파리의 거리:비 오는 날’
1872년, 아르장퇴유에서 열린 요트경기장에서 모네를 만난 것은 그림과 뗄 수 없는 운명이란 걸 증명해준 것과 같았다. 화가의 길은 다른 이들의 길이라 생각했건만, 다시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무수한 생각들이 카유보트의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화가의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건만, 다시 붓을 들어야겠단 생각이 굳건해졌다.

화가이자 인상주의의 후원자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 으레 미술사 속 유명한 예술가들은 예술과 돈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겨우 생존하며 삶이 힘겨워질수록 그 예술혼은 더욱 불타올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가는 게 대부분일진데 카유보트의 삶은 예외였다. 되려 카유보트의 경제적 능력은 그가 가진 화가로서의 빛을 조금은 퇴색케 했다. 사후 70여년이 지난 다음 다시금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근래에 와서 더욱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으니, 삶도 그림도 여느 화가들과는 달랐던 작가임에 틀림없다.

르누아르는 “만일 카유보트가 후원자로서 너무 도드라지게 드러나지 않았다면, 진지하게 화가로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는 화가이면서도 그리 화가 대접을 받지 못한 화가였다. 되레 후원자역할 때문에 화가로서의 재능이 채 빛을 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카유보트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돈 걱정이라곤 없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기도 했지만 공부도 그림도 곧잘 했다. 법학을 전공하고 22살엔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예술을 향한 열망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다시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게 했다. 비록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남겨주신 막대한 유산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가능케 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자화상’

부자 화가의 눈에 비친 파리는 다른 모습이었다. 새롭게 변신하는 파리 시가지의 근대적 모습이 그림 안으로 들어왔다. 신기술이었던 사진술도 꽤나 신기한 것이었다.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도시의 일상을 보여줬다.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1877)’은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 같기도 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세 사람의 모습, 한 우산을 같이 쓴 남녀는 오른쪽을 힐끗 보고 있고, 뒷모습만 보이는 남성은 몸의 절반이 채 나오지도 않는다. 그 뿐인가. 정확하게 4등분된 그림의 왼쪽 하단은 온통 보도블럭만으로 채워졌다. 비오는 날 보도블록의 사이사이로 빗물이 흘러가는 모습은 꽤나 사실적이어서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산 끝의 주름과 여인의 옷자락, 얼굴에 드리운 면사포의 사실적 묘사는 더욱 생생하게 화면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실제 사람과도 같은 크기로 그려졌기에 그 안으로 같이 걸어 들어갈 듯 착각을 일으킨다. 사진처럼 생생하게 그 현장을 전달해주는 그림은 세련미가 철철 넘쳐흐른다. 이 그림은 1878년 인상파 세 번째 전시에 출품됐다. 바로 카유보트가 기획자이자 후원자였던 전시였다.

카유보트는 당시 유일하게 인상파 그림의 진가를 알아본 몇 사람 중 하나였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동료 화가들에게 든든한 존재였다. 작품을 사주기도 하고 작업실을 빌려주기도 하였으며, 전시회를 치르는 비용을 대기도 했다. 그렇게 후원자이가 작가로 인상파 전시에 참여하고 전시도 기획했다. 또 그가 가진 넓은 인맥으로 인상파 전시에 많은 귀족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유보트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作 ‘창가에 있는 남자’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세계와는 조금 달랐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에 의한 새로운 색채, 해체된 형상 등의 그림과는 달랐다.

카유보트는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자연의 빛과 색채보다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그려내되, 인상주의의 색채만은 함께했다. 1875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바닥을 긁는 사람들’을 보면 도시의 남성노동자가 등장한다. 작가의 작업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렸다. 노동자라 하기에 이들의 신체는 마치 고대 조각상처럼 완벽하고 건장하게 그려졌다. 당시까지도 노동자의 모습이란 밀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시골 농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유보트의 그림에는 도시의 노동자가 등장했으며, 근대도시의 변화를 관조하는 많은 남성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발코니에서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성의 모습엔 파리의 근대화를 직접 목격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 도시민인 자신의 모습이 투과된다. 정원사나 목욕하는 남성 등 유독 남성들이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독신으로 살았던 자신을 그림으로나마 흔적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특히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림이 유독 많은 건, 아마도 부르주아로 꽤나 좋은 집에 살면서 늘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은근히 반영된 그림들이다. 부유한 화가만이 그릴 수 있는 색다른 구도의 그림들이 아닐까.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겐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 68점과 막대한 유산이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기에 많은 부분 자신을 돌봐주던 가정부에게도 갔었고, 그가 사들였던 인상주의 그림들은 전부 정부에 기증했다. 단,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서였다. 하지만 정부는 살아있는 작가들의 미술관 전시를 거부했고, 루브르 역시 이 작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작품들은 오르세미술관으로 가게 됐고, 나중에서야 프랑스 정부는 이 그림들을 다시 거둬들이기 급급했다.

카유보트에게 돈은 예술을 확장시켜주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처절한 생의 몸부림이 예술로 승화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부유함은 동시대 작가들과는 다른 시선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다.

근대 도시로 변화하는 파리의 모습과 여유 넘치는 파리지앵의 모습들은 카유보트 그림의 단골소재였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여가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근대도시민, 그리고 이를 관조하는 화가의 시선, 신문물이었던 사진술 등은 카유보트가 독자적으로 추구하려했던 예술세계였다. 우표를 수집하고, 정원을 가꿔 다시 팔기도 하고, 자신이 소유한 선착장에서 배를 만들기도 하고, 요트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하는 부유한 파리시민이었던 카유보트는 새로운 소재들을 그림에 등장시켰다. 자신의 예술을 넘어 동료들의 예술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고, 예술과 돈 두 가지를 손에 쥐고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열어갈 수 있게 진두지휘했다.

사후 70년이 돼서야, 그리고 현대에 와서 더욱 주목받는 화가인 카유보트. 인상파 후원자에서 19세기 파리 도시 풍경을 가장 잘 그려낸 인상주의 주요 작가로 재평가 받는 데에는 그의 예술적 특별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더불어 카유보트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 중 누군가는 미술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또 몇몇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세기 파리의 ‘엄친아’같았던 카유보트. 이 엄친아가 남긴 업적은 ‘예술&돈’의 또 다른 면모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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