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6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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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80년 5·18에서 ‘무죄’인가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 입력날짜 : 2019. 07.21. 17:44
이음새가 좋았다. 곰팡이도 피지 않았고, 고장도 나지 않았다. 일본과 전두환이 그랬다. 1979년 10·26사건으로 유신(維新)이 죽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은 잽싸게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허리에 찼고, 이후 둘은 밀월을 즐긴다. 그 음습한 행각을 맨 먼저 파헤친 건 일본 땅에서였다. 5·18이 가고 두 달이 채 안 된 1980년 7월20일, ‘한국 1980년 5월, 광주민중의 결기’란 이름의 책자(A4 용지 크기, 94쪽)가 출간된다. 일본의 국제연대계간정보지인 ‘세계에서’ 편집위원회와 日韓조사운동 단체가 공동 편집한 것으로, ‘광주사태에서 일본 정부는 어디에 있었는가’란 제목을 달고 그 ‘어디’를 추적한다. 이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최근 일본에서 어렵사리 수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광주사태에서 일본은…’이란 글은 고작 1쪽짜리지만, 일본의 놀놀한 속내가 들여다보여 온몸에 전율이 온다. 아니, 이럴 수가! 불의(不義)한 전두환이랑 짝꿍이 되다니….

글은 들머리에서 셋으로 압축한다. “하나-(1980년) 5월20일, 5·17쿠데타가 일어나자 전 아프가니스탄 대사 마에다(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제대를 졸업한 한국통)를 특명대사로 파견했다. 광주결기와 피의 탄압 때 방한하도록 하고 전두환그룹(신군부)과 협의했다는 것. 둘-마에다 특사를 6월5일 귀국시키고 대신에 6월9일 기우치 외무성 아시아국장을 서울로 보냈다. 광주진압 후 전두환그룹과 협의했다는 것. 셋-목포에 있는 일본 기업에서 데모대들이 탈취한 버스에 대해 곧 전두환그룹에 정식으로 ‘조사 강화’를 요청했으며, 부산영사관 직원 3명을 일본인 보호를 위해 현지에 파견했다.”

그 세 가지 공식 행동에 대해 익명의 글쓴이는 아주 짧은 의견을 내놓는다. “이것뿐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에다 특사 파견 자체가 ‘전두환쿠데타’를 승인하는 외교행동이었다.” 비밀금고 같은 데에 가둬 두고픈 일본 외교를 세상에 끄집어내 단칼로 우세시킨 ‘익명’은 지금 살아 있을까? 이어 그는 “‘불쾌한 기분’을 나타내는 대신에 특사를 파견, 전두환그룹과 접촉하고, 광주를 피로 제압한 다음날(5월28일) 다른 나라보다 먼저 전두환과 정식회담을 가졌다”고 껑껑 짖어댄다.

5·18 당시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광주사태’ 관련 일본 정부의 입장 표명에 대해서도 “이 정도로 명확한 지지의 의사 표현을 전두환은 세계 어느 정부로부터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셋 중 하나만 보자. 일본 정부가 1980년 5월27일(5·18 광주 최후의 날) 내놓은 공식 성명은 탁월한 외교적 어법을 동원하고 있다. “광주시 중심부에 있는 전남도 청사를 비롯해 여러 곳에 무장한 과격파를 모두 제거하고 정부 관할 하에 두었다는 것을 중시하고 광주의 질서회복이란 제일 관문은 돌파했다”며 은근슬쩍 전두환의 손을 잡는다. 속엣말로 하면, 전두환 당신, 광주사태 잘 처리한 거야, 걱정할 거 없어, 이쯤 되는 것인가.

세월이 무심했나, 사람이 무심했나? 하여튼 간에 그 광주로부터 세월은 흘러 2000년 어느 봄날, 박선원이란 청년의 논문이 한 전국종합일간지에 소개된다. 신문은 기사의 리드(Lead, 보도기사에서 그 내용의 핵심을 담은 첫머리의 짧은 구절)에서 ‘…역할을 했다고 주장, 상당한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며 독자의 눈을 자극한다. 나는 이 논문이 이 땅에서 생산된 ‘일본-전두환 커넥션’의 첫 기록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주사태에서 일본은…’보다 훨씬 많은 팩트를 담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시간적 범위도 10·26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에 올라탄 이후까지로 확장했다. 스노베 등 관련자들의 증언을 녹취, 신뢰도를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기도 하다.

박선원은 당시 연세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였고, 영국 워뤽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미·일 삼각동맹안보체제의 정치적 역동성 : 1979-1980년 한국의 정권 교체기에 나타난 일본의 영향력’을 썼는데, 이 논문 3장 ‘1979년 1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개입’ 부분을 다루면서 그 ‘검은 커넥션’을 집어 올린다.

무엇이 둘을 단짝이게 했을까? 한국의 정치가 ‘박정희식(式)’ 강압정치라 해도 안정만 유지되면 자국에 이로울 거라는 생각과 이웃의 지지 없는 ‘나라 따먹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 둘 사이의 ‘필요’가 ‘어깨보증’에 이르게 했을 거라고 박선원은 분석한다. 짝 만들기 중신아비는 허문도, 그 사람이었다. 당시 주일한국대사관 수석 공보관인 그는 한국 땅 육군본부에서 주한일본대사 스노베를 만나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다”고 했다. 스노베는 뽀르르 본국에 보고했고, 그로부터 짝꿍십(ship)이 커나갔다. 12·12 때도 허문도가 스노베한테 쿠데타를 사전 통보하고 협력을 구했다.

일본은 5·18 직전까지 최소 여섯 차례에 걸쳐 ‘북한남침설’을 전두환그룹 쪽에 흘렸다. ‘5월10일 것’ 또한 가짜인 줄 알면서도 전두환은 5·17쿠데타를 추진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었다. ‘북한이 한국사태를 결정적 시기로 판단해 5월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는 5월12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정국 안정을 위한 강도 높은 조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튿날 위컴 주한미군사령관한테 특수부대(공수부대) 이동의 정당성과 계엄 확대 등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어 터진 게 뭔가? 5·17쿠데타, 그리고 그에 저항한 5·18이다.

작금, ‘경제왜란’이란 말이 나라를 뒤덮고 있다. 39년 전의 일본을 떠올리면서, 이 땅의 우리는 무엇을·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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