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2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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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밖 화가들]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에드가 드가
화려한 현실 저편 어두운 삶의 흔적, 역동적인 美로 덧칠하다

  • 입력날짜 : 2019. 08.14. 17:49
드가 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75-1876, 파리 오르세미술관)
마흔의 나이, 드가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40년이란 시간과 전혀 다른 생을 예고함이나 다름없었다. 온전히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시간은 그때까지였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의 부도가 가져온 여파는 드가를 향했다. 엄청난 빚이 떠안겨졌고, 이제는 그림을 파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빚을 갚기 위해 붓을 잡은 손도, 발걸음도 더욱 분주해졌다. 발레 극장이나 오페라 극장, 세탁소 같은 굳이 모델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곳들을 더 찾았다. 발레리나, 오페라 가수, 일하는 여성들, 그들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손은 더 빨라졌다. 무대를 휩쓰는 이들의 역동적 움직임은 고스란히 손끝에 남았다. 고된 노동을 하는 여인들의 삶의 고단함도 그대로 담겨갔다.

고된 삶의 여정이 시작된 드가와 달리 당시 프랑스는 벨에포크(Belle Epoque·풍요와 평화의 시대) 시기(1872-1914)가 시작되던 때였다. 혁명의 소용돌이도 잠들고, 정치적 혼란도 잦아들었다. 허나 산업화와 도시화를 급격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이 화려해져가는 만큼 그 이면의 풍경은 더욱 무미건조해져갔다. 심해져가는 빈부격차와 늘어가는 도시의 노동계급. 당시 여성들에게 허락된 직업군은 세탁부, 매춘부, 오페라 가수, 발레리나 등이었다. 부르주아들의 향락을 위해 존재했던 무희들, 힘겨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현실의 여성들, 드가는 그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발레라는 아름다운 소재의 그림이건만, 뭔가 석연치 않은 아름다움은 그러한 연유였을까.

드가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의 일상, 향락문화가 발달한 파리의 이면을 채운 뭔가 유쾌하지 않은 모습들이 주제가 됐다. 밤무대 가수로 화려하게 치장된 모습 뒤로 부르주아들의 향락의 도구가 돼가는 여성들, 갓 소녀티를 벗어가는 십대의 발레리나들, 무대의 막이 내리면 검은 옷을 입은 신사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갈지도 모르는 소녀들이었다.
드가 作 ‘14세 소녀 발레리나’ (1932, 파리 오르세미술관)

생계를 위해 무거운 세탁 바구니를 들며 잠시의 짬도 없이 다림질을 해대는 여인들. 지친 노동자들의 모습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독하게 취기가 올라오는 압생트는 돈이 많지 않았던 예술가나 노동자들이 즐겨 마시던 술이었다. 드가는 즐겨 다니던 카페 누벨 아테네를 배경으로 두 남녀를 그렸다. 유명한 모델이었던 엘렌 앙드레와, 보헤미안 화가였던 마르셀랭 데부탱을 모델로 연출하고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남녀는 공허함 그 자체다. 서로 마주보고 있지도 않으며 화면 안에 안정적으로 앉아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세히 보면 테이블의 다리도 그려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유대감은 전혀 없고, 오로지 취기에 하루의 고단함을 잊어버리고픈 애환만이 남았다. 눈이 풀린 듯 한 여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절묘하다.

어찌 이리 그 감정 하나하나 잘 그려내었을까. 드가의 그림들엔 인물들의 이목구비가 보이는 게 아니라 감정과 상황이 짙게 보인다. 압생트 한 잔에 현실을 잊어버리고자 했던 이들의 고립이 그려진 게다.

그렇다면 드가 자신에게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의 부도로 인생관이 바뀐 건 아니었다. 부유했지만,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삶이었다.

드가는 이탈리아와 미국에 은행을 가지고 있던 친가와 미국에서 목화를 판매하는 기업을 운영했던 외가를 가진 부유한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에 비해 어리고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오랜 기간 남편의 동생과 외도를 했다. 아내를 너무 사랑했던 아버지는 이를 알고도 모두 묵인했다.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낳았지만, 서른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드가 作 ‘다림질하는 여인들’ (1884-1886, 파리 오르세미술관)

드가의 나이 겨우 열세 살, 부모님의 복잡다단한 삶을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이런 덕분인지 드가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여성혐오주의자’라 불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온전히 느끼지도 못했고, 평범한 가족의 모습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것도,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당시 인상주의 멤버로서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사트, 수잔 발라동 등 여성 화가들을 적극 교육하고 이들이 화가로 활동할 수 있게 적극 지지한 건 드가였다. 메리 카사트와는 연인관계였지만 결국 동료라는 관계 하나만을 유지했다.

가족도 연인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은 드가는 스스로에게 오로지 예술만을 허락했다. 법학도에서 예술학도로 항로를 선회하며 드가는 예술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에콜 드 보자르에서 수학하고 앵그르에게 그림을 배우며 고전주의적 기법들을 완전히 익혔다.

얼핏 슥슥 별 것 없이 그려낸 것 같은 그림들 속에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탁월한 능력은 드가만의 노력이 일궈낸 것이다. 초기의 그림들엔 그 결과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스스로를 인상파 작가보다는 사실주의 작가로 불리길 원했던 것처럼 드가는 그림들에 자신만의 농익은 붓질을 짙게 담았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작가들이 자연 안에서 찰나의 빛과 색을 그려낸 것과 달리, 드가는 주로 실내의 풍경을 그렸다. 실내풍경에만 집착함은 드가의 시력이상이 가져 온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눈부심병으로 인해 늘 자연광 아래 선글라스 없이 생활이 어려웠고, 30대 후반부터 실내의 조명등 아래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시력을 거의 상실할 무렵엔 작업실에 은둔하며 조각작업에 몰두했다. 지금이야 평범할지 몰라도 당시 드가가 만든 발레리나 조각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실제 발레복과 머리를 붙여 완성한 것이다. 사후 드가의 집에서는 엄청난 양의 목욕하는 여인들의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많은 여인들을 그린 그림과 조각들, 예쁘게 꾸며진 여성들은 하나도 없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어머니의 아픈 상처 덕분에 여자라는 자신과 다른 성을 멀리했지만, 아름다움의 근원이랄 수 있는 여성의 존재는 포기할 수 없는 예술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움 이면의 숱한 현실들도 그림 안으로 들어왔고, 드가만의 인상주의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은 완성됐다.

자연보다도 인간의 모습들에 주목하고 그 순간적이고도 역동적인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내며 아름다움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가정형편의 변화와 건강이상에도 굴하지 않았던 예술혼은 더 섬세하고도 광대한 이미지들로 우리들을 그림 앞에 불러 세운다.

“그림을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따라 그려라. 다시 시작하고 다시 따라 그려라” - 에드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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