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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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40주년기념 큐레이터 장경화 '오월의 미학'](14) 조정태
책무감에서 출발된 민중미술의 넓은 바다

  • 입력날짜 : 2020. 10.27. 18:16
조정태는 교직자인 부친의 학교를 따라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80년 5월 완도중학교 1학년이었다. 읍내를 집중시키던 ‘광주시민군’의 유리창 없는 버스, 각목을 손에 쥔 청년들을 호기심과 의아하게 봤던 기억이 남겨져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니면서 미술반 활동을 통해 그림실력을 인정받고 자연스럽게 미술대학 입학과 함께 현재까지 작품생활로 삶을 의탁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진보적 선배의 그림에 매료돼 비판적 사실주의 예술이념에 관심을 갖고 재현적 회화를 경계하면서 작품에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군 전역이후 복학과 더불어 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대형 걸개그림 제작으로 미술대학 전체건물을 덮는 설치작업을 주도했다. 당시 정치적 이슈를 주제로 했던 그림들이었다. 이 시기부터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소비에트 미학 학습과 졸업을 앞두고 ‘광미공’(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활동에 전념한다. 이는 그가 민중미술 작가로 고단한 삶을 출발하는 선언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민중미술, 당대를 증언자 투쟁의 무기로
조정태는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 후 대학시절 후배들이 그를 따랐었다. 인물이 후덕하게 잘생겨서가 아니다. 돈이 많아 막걸리와 맛있는 식사를 잘 사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말 수가 적고 침착함과 성실함, 겸손함과 따뜻한 인간미는 후배들에게 신뢰감과 든든함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러한 면면은 선배화가에게도 언제나 사랑받는 후배로 그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그러던 중 주변지인과 선배에게서 광주 5월에 관한 수많은 구전과 자료들을 접하고 최근의 일련된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문제의 함수관계를 대비해가면서 무엇이 정당하고 옳은 일인가에 대해 깨우쳤다. 화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서, 시대를 증언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한다. 그 깨우침은 두서없이 학생회 활동과 진보적 미술단체 활동으로 연장된다.

그는 92년 ‘광미공’ 입회와 창작단 활동과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과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광주지회장 등의 활동은 1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 청년기를 미술단체 조직 활동을 위한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이렇게 진보미술단체의 막둥이로 시작된 조직 활동은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광미공’ 창작단 활동의 공동작업(걸개그림, 연작판화제작)에 소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40대 중반이 돼서야 미술단체 일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개인작품 활동을 통해 드러내야 하는 화가 본연의 일을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작품 제작에 전념을 하게 됐다.

2010년 초, 국내 정치·사회적 뜨거운 이슈와 새로운 갈등은 여전했고 미술계에서는 서구에서 수입된 형식미학의 예술양식인 ‘포스트 모던’ 미술운동이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영향에 자신의 독창적 예술양식을 위한 실험과 도전을 시작하게 됐다. 이념적으로는 비판적 리얼리즘(Realism)을 견지하고 양식적으로는 ‘포스트 모던’과 시대의 트렌드 담보하는 물결에 편승하려 했다.

그리고 주변 진보미술인과의 예술적 차별성과 동시에 자기 미학어법을 찾아가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조직 활동을 통해 자신도 느끼지 못하게 주변 화가들과 함께 동일한 미학어법에 묻혀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상(자연)을 해석하는 미학적 아우라(Aura)는 자연을 통한 역사적 현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춰가야 한다는 민중미술의 과제를 숙지하고 있었다. 1980년-2000년대 정치·사회적 뜨거운 시기를 보내면서 거칠었던 민중미술은 대중예술로 확산과 공감으로 예술적 감흥을 회복시켜 민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감흥은 서정성에서 출발돼야 할 것이라는 점은 민중미술도 역시 동일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어떠한 예술가든 고통의 시간 감뇌와 인문적 연구, 조형실험을 반복하면서 얻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예술적 방황으로 아무런 작업도 할 수 없었다. 사실적 묘사력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긴 시간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캔버스 앞에서 막막함을 느꼈을 것이다.

예술은 당대 사람이 어떠한 철학과 정서와 감정으로 살아왔었던가에 대한 기록이다. 예술가는 그 당대를 기록하는 증언자로서의 책무가 있다. 그는 당대의 증언자로 적극적으로 민중미술이라는 예술적 이념을 선택했고 그리고 무기가 돼 정당하지 못한 시대에 당당히 맞서려 했다. 예술가로서 그 정의감의 책무를 선택한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문턱을 넘어
조정태는 12여년의 긴 공백기를 갖고 2013년 4회 개인전(광주·은암미술관)을 개최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의 독창적인 미학적 어법을 위한 고뇌의 시간 끝에 제작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일부는 과거의 작품경향도 함께 전시가 됐으나 과거 전시와는 확연하게 차이를 보여주는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민중미술의 숙제였던 거칠고 무서운 그림에서 자연을 통한 역사적 현재성과 서정성을 함께 확보해가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전시였다고 보인다.

4회 개인전의 화두는 ‘몽환(夢幻)의 시간’으로 오랜 시간동안 고뇌했던 자신의 속내를 솔직한 고백으로 보인다. 그는 그동안 미학적 양식을 뿌리내리지 못하고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처럼 긴 시간동안 환상적(몽롱한) 상태로 헤매고 다녔다는 자신의 독백이었다. 이 시기 그의 일부 풍경작품에 드러나 듯 몽한적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백산’ 193.9×130.0㎝ 혼합재료 (2013)

그러나 오랜 동안 고민의 성과를 거두는 작품도 내놨다. ‘백산’(2013)은 지난 동학 100주기 기념전(1994)에 출품을 위해 방문했던 고부와 백산현장을 다시 방문해 현장감을 갖고 다시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작품 하나를 얻기 위해 눈보라 치는 역사적 현장을 다시 방문해 자신이 120여년 전 동학군이 돼 눈보라치는 자연을 체감하면서 얻어진 결과다. 이렇게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기에 앞서 풍경사진이 아닌 현장 속에서 역사의 현재성을 읽어가며 공간감을 확인한 후 건강한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를 갖는다. 박제된 풍경이 아닌 감정이입이 된 풍경으로 예술적 감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작품 ‘백산’은 눈보라로 인해 뚜렷하게 볼 수는 없지만 앙상한 가지의 나무 밑 둥과 몰아치는 거센 눈보라는 동학의 출발을 알리는 함성과 거친 숨소리, 예리한 칼날이 맞부딪치는 소리, 죽창 다듬는 소리,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동학군의 결기를 다지는 현장의 리얼리티(Realty)를 담아내고 있다. 거칠고 앙상한 마른 나무와 숲은 그 현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동학군이 어떠한 대의로 전쟁에 임하고자 했던지를….

대형 캔버스의 ‘백산’은 거친 눈보라를 담아내고자 물감을 뿌리고 흘러내리게 하고 거친 붓질을 중첩시켜 반민족과 외세를 상징한다. 눈보라 속의 손과 발에 파고드는 추위는 전신을 마비시키면서 다 피지 못하고 꺾이는 동학의 운명을 예고라도 한 것인가? 화면의 대담한 구성과 눈보라는 120년 전, 실패한 동학의 안타까움으로 새겨진다. 그들은 깨어있었던 우리 선조였음을, 앙상하고 거친 나무와 숲, 눈보라를 통해 증언한다.

조정태는 청년기 시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예술적 고뇌가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머물러있다. 그는 “열어보지 못한 문, 나는 항상 문 앞에 서있다. 그리고 그 문 뒤에 또 다른 문이 있음을 알고 있다.(중략) 나는 이념과 형식의 경계 가장자리에 발을 걸치고 세상을 바라보며 허위 속에서 살아왔다. 내 안의 위악을 폭로하는 진실한 자기고백 없이 자기연민으로, 머리로 그리는 그림, 현재 내 삶의 반영이 아니다.”(에세이, 2018년, 4인4색 카달로그 부분발췌) 이 글에서 그가 만족스러운 작품을 위해 진중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자백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예술에도 산을 넘기고 나면 그보다 더 큰 산이 앞을 막고 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느끼는 고통이다. 그가 이러한 고뇌를 거듭하다보면 어느 날 더 큰 예술가로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예술을 향한 열정이 그 누구보다 강렬한 작가이기에 확신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주는 선물
그의 고향은 남도 끝자락 섬, 완도다. 그 고향에서 중학교까지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를 보고 자라왔다. 거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태풍의 바다와 맑은 바다의 눈부심에 대한 기억은 중년이 돼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향수에 젖어 그리움이 가득하다. 이러한 기억은 이제 작품의 소재가 되고 주제가 돼 예술로 승화돼 가고 있다.
‘파도-혼불’ 27×40.5㎝ Oil on canvas (2019)

이제 그는 확장된 바다를 바라보며 그 바다에서 체득되는 역사적 현재성을 읽어가려 한다. 그의 작품은 표피적으로는 서정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 속에서는 감추어진 역사와 민중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잔잔한 물결 속에 때로는 눈부심으로 때로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로 이야기한다. 그 바다에 강건하던 바위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그 바다에 수많은 목숨을 잃어야 했던 그 시대의 민중은 혼 불이 돼 떠돌며 밤바다를 밝히고 있다. 작품 ‘파도-혼불’(2019)에 나타난 비가 내리는 고요한 밤바다에 순간 흔들리는 파도는 어느 시대의 민중일까? 혼불이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정적의 밤바다에서 상징적 메시지가 읽혀진다. 순간 일어났다 부서지는 가녀린 파도와 그 파도의 끝자리에서 춤을 추듯 일어나는 혼불은 누구의 흔적인가? 작품 ‘파도-혼불’은 임진왜란에 목숨을 잃었던 민중인가? 아니면 제주 4·3사건의 민중일까? 아니면 어두웠던 시대의 정치범으로 노동운동으로 탄압받았던 민중일까? 모두가 기억해야 할 그 시대의 아픔이다.

작품 ‘사진-정적’(2019)은 새벽안개가 깊은 물가에 이름 모를 잡풀과 들꽃이다.
‘정적’20×25.5㎝ Oil on canvas (2019)

서정적이면서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작품이지만 그 풍경 역시 어느 시대의 아픔이 있었던 장소였다. 아름다운 풍경에는 감춰진 아픔이 있다. 새벽의 짙은 안개로 명확하지 못하고 예측이 어려운 현대사회를 잡풀과 들꽃은 우리시대의 민중으로 읽혀져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언제 어떠한 외부적 압력으로 어느 시간에 생명을 다 할지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존재하는 운명인 것이다. 이처럼 그는 풍경 속에 우리현실을 은유적 어법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조정태의 작품은 예술의 산을 넘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형상은 생략되고 단순해져가고 상징성과 은유화는 더욱 깊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일상 속에 보이는 단순한 풍경에 역사성을 담아내고자 한다. 또 하나의 예술의 산을 넘고 문을 열어간 것으로 보여 진다. 그는 청년 화가의 열정으로 앞으로도 계속 진보해갈 것이다.

대중은 대중매체에 길들어져 상황에 따라 부유한다면, 민중은 깨우쳐지고 각성된 대중이다.

조정태, 그는 그림을 그리는 주제는 깨우쳐진 민중이다. 시대를 증언하고 기록하기 위해 오늘도 그는 작업실에서 새로운 민중미술의 장을 열어가기 위한 고뇌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의 민중의 한 사람이자 화가이기 때문이다.


※작가 약력
▶1967년 완도생
▶조선대 미술대학 졸업, 전남대 대학원 수료
▶개인전 8회(광주, 서울, 부산, 담양)
2020 광주5·1840주기 기념 ‘별이 된 사람들’展(광주시립미술관)
제주 4·3 미술제 ‘래일’전(제주 4·3 기념관, 2019 고(故) 노회찬 의원 1주기 추모전展(서울 전태일 기념관), 2016 북경스튜디오 입주작가 발표전(중국 북경 798예술구), 2014 충북민족미술아트페스티벌(충주 우민아트센터 전시장), 2008-2011년 5·18민중항쟁 특별기획전 기획(5·18기념관 및 구 전남도청 일원), 2005 항쟁미술제(부산민주공원 ,광주5·18기념재단, 서울관훈갤러리)
▶현 광주 민족예술인단체총연합 회원, 광주 민족미술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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