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9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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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소설가의 세상읽기]우리는 어떤 회복을 해갈 것인가
‘팬데믹’과 ‘회복’…공동체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
고통·고립 경험한 그들도 사회 구성원, 따돌림 넘어 어울림으로
‘아픈 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시작

  • 입력날짜 : 2021. 01.14. 19:32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임이 분명하다. 일일 확진자 수가 천명을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지역에서도 연일 확진자가 두자리 숫자를 기록하고 있고 70명을 넘는 신규환자가 하루 만에 발생하기도 했다.

공공시설 운영이 제한되고, 5인 이상의 사적 모임이 금지됐으며 종교활동도 비대면으로 진행할 것이 독려되고 있다.

이처럼 대유행의 시기이고 하루 천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를 앓고 있는, 혹은 앓고 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리지는 않는다.

폭풍처럼 진격해오는 감염병의 유행 속에서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들을 접하고 있다. 작은 돌기가 나 있는 동그랗고 붉은색의 이미지는 언제든 불쑥 등장해 경각심을 강화하고, 매일 아침 갱신되는 확진자 수치와 증감을 나타내는 그래프는 하루를 시작하는 신호가 됐다.

백신을 만들어내는 제조회사의 생산실적이 이십사 시간 뉴스채널에서 보도되고,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의학적 용어로 변이바이러스의 종류를 설명하는 인터뷰도 간간이 들린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상황을 따라잡기 쉽지 않을 정도로 코로나19와 관련된 정보들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코로나19를 앓고 있는, 혹은 앓았던 적이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마스크로 상징되는 거리두기와 재택근무, 화상회의, 원격 수업 등의 언택트한 만남이 낯설지 않게 됐는데도, 이 병을 앓고 난 이들의 경험만 여전히 낯선 영역에 가두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바이러스의 종횡무진 앞에서 비대면 사회로의 변화와 인류의 미래가 유려하게 전망되지만, 정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감염병으로부터 살아남은, 혹은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병이 존재하면 그 병을 앓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지금 우리사회는 마치 전염병만이 존재하고 그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이들을 비가시화하고 있을까?

전염병의 공포 때문이라고 성의 없이 답하기에는, 이들이 겪는 고통은 매우 크다.

간혹 유튜브나 SNS 채널을 통해 코로나19를 앓았던 경험들이 아주 ‘개인적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들은 진통제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몸의 고통을 호소하고, 미각과 후각의 상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이야기한다.

감염병을 앓는 과정과 그 이후의 신체적 증상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이들을 공통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입힐 피해를 걱정하는 죄책감의 시간들이다.

코로나19를 앓았던 이들의 고통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머무르면서 사회적 목소리를 갖지 못할 때, 개인의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이 얼마나 온전히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벌써부터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늘도 코로나19로부터 회복되어가는 이들이 있고, 대유행의 사이클이 지속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언제든 우리 공동체는 회복을 준비하고 회복돼야 한다.

팬데믹과 회복은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선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겪고 준비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코로나19를 겪은 이들이 자신의 고통과 경험을 사회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 회복은 지체될 수 밖에 없다.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프랭크는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저자는 달리기를 즐겨 하던 서른아홉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죽음을 경험했고 이후 암이 발병해 치료를 받았다.

특히 그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암으로 인한 낙인이었는데 이는 “한 인간으로서 내가 갖는 가치와 암이 상관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며 특정한 누군가의 “몸이 위험하고 죄를 지었으며 정결하지 않다는 표시”라고 지적한다.

이 대목에서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뉴스에는 어김없이 방역지침을 어긴 이기적인 사람으로 확진자를 비난하는 댓글이 달리고, 세금으로 이들을 치료해주는 것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다.

물론 지금과 같은 대유행의 시기에 방역수칙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지만, 감염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 또한 잔인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순간 바이러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지 않은가.

코로나19를 앓은 이들은 신체적 고통에 더해 대인기피증과 불안, 우울 등을 경험한다고 털어놓고 있다.

감염병이 내 몸과 일상에 가져온 변화를 가늠하기도 전에, 바이러스 전파자이자 가해자로 낙인찍히면서 이들은 ‘아픈 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 사이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우리는 이미 ‘회복 중인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회복사회)’ 안에 살고 있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질병이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면, 팬데믹은 공동체의 경계로 구성원들을 데려간다.

질병의 경험이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날카로운 경계에서, 어떤 삶을, 어떤 가치를 새롭게 조망할 것인지 물어야 하며, 이는 결국 우리가 어떤 회복을 해나갈 것인가와 닿아있다.

이는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레베카 솔닛이 말한 대로 “고통과 상실은 남들과 함께 경험할 때 다른 모습로 바뀐다”는 점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통과 상실을 경험한 이들을 고립과 낙인 속에 버려두는 공동체가 온전한 회복의 미래를 그리지 못함은 당연할 것이다.

회복하는 우리의 미래를 그리는 그 시작은 ‘아픈 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들이 경험하는 회복의 시간과 회복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연결의 감각을 놓지 않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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