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례없는 풍년인데… |
| 2004년 10월 04일(월) 00:00 |
추곡수매가 시작됐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농림부가 지난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지속되어온 추곡수매제도의 '사실상 폐지'를 골자로 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유례없이 풍년인 들녘에는 그래서 농민들의 한숨이 가득하다. 농민들이 결실의 기쁨을 잊어버리게 된 것은 폐지될지도 모를 추곡수매 때문만이 아니다. 굳게 닫혀 있던 쌀시장 개방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 상황은 농민들에게는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우리쌀과는 가격면에서 4∼5배나 차이가 나는 미국쌀과 중국쌀이 수입되는데 있어 우리 농촌은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안없는 수매제 폐지 안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쌀값안정이나 쌀농가에 대한 간접적인 소득지원효과가 미미하다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 추곡수매제다. 하지만 농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쌀소득이 농가소득의 21.6%, 농업소득의 46.9%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자료(2002년 기준)에서 볼 수 있듯이 농민들에게 쌀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절대적이다. 농민들이 생산한 쌀의 대부분은 정부수매와 농협자체수매를 통해 처리된다. 자가소비용을 제외한 극히 일부분의 추곡만이 일반 중간상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정부수매가 해온 역할은 농민들에게 결코 미미하지 않다. 올해 전남지역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추곡수매 계획량은 543만8천가마(40㎏)다. 대략잡아도 3천115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수매자금이 전남의 농민들에게 지급되는 것이다. 농업 소득원의 다변화가 이뤄지지않은 우리 농촌의 현실까지 감안하면 정부가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이같은 추곡수매자금은 주된 수입이자 소득이요 '목돈'이다.
추곡수매제의 역할이 결코 미미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은 이를 대신할만한 다른 간접적인 소득지원시책이 거의 없다는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령의 농가를 대상으로 쌀농사를 그만두게 하는 대신 소유농지의 전부를 농업기반공사나 전업농에게 매도하게 하고 지급하는 경영이양직불제나 영농규모화사업 등 이른바 '쌀산업종합대책'은 아직 그 효과가 미미하다. 국제쌀값과의 경쟁력을 감안해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시책들이지만 10a당 생산비는 1990년 37만6천178원이던 것이 2002년에는 53만9천609원으로 오히려 급등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쌀농가 가운데 0.5㏊ 미만의 영세농가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도 40.3%에서 43.5%로 오히려 늘어났다. 쌀종합대책에 대한 대다수 농민들의 반응이 기대 이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농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도 못하고 있는 이같은 대책을 내세워 추곡수매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농민들을 아무런 대안없이 내팽개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농업에 대한 시각부터 바꿔야
70년대 녹색혁명이 성공을 거둔 이후 우리 농업정책의 핵심은 '탈농촉진'에 있어왔고, 이것이 농정에 대한 농민 불신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정부의 쌀산업종합대책의 핵심인 쌀농가 경영규모화와 생산비 절감시책의 근간도 탈농정책이다. '탈농을 조건으로 2㏊ 이내의 소유농지를 농업기반공사나 전업농에게 전부 매도하거나 농업기반공사에 5년 이상 장기임대하는 경우 경영이양일로부터 70세까지 최장 8년간 직불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경영이양직불제다. 이에 응하는 농민은 쌀농사를 지을 수는 있으나 취미나 자가소비 목적이어야만 한다. 쌀농가의 규모화가 생산비 절감에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탈농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탈농은 농민들을 대책없이 농촌에서 쫓아내는 식이라는 점에서 추곡수매제 폐지와 똑같은 조치다. 탈농한 고령의 농업인 대부분은 경영이양직불금에 의존하더라도 대도시에서 생계를 꾸려갈 처지가 못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쫓겨난 농업인을 대신할 젊은 기업농을 찾아내기도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현재 진행중인 쌀 재협상을 보는 농민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이번에도 농업이 희생양이라는데도 원인이 있다. 해마나 엄청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분야가 농업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 농업을 산업의 한 분야로 격상시켜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애정있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투입된 자본의 효율은 아예 외면되어 왔다고 해야 옳다. 전체 쌀농가의 절반에 가까운 영세농을 모두 농촌에서 내쫓고 젊은 기업농을 육성하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 아래 엄청난 국가예산을 투입한다고 해서 우리 쌀산업을 회생시킬 수는 없다. 쌀시장 개방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쌀산업종합대책을 수립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해야할 것은 지금이라도 우리의 농업정책의 방향이 진실로 농민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특히 쌀농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세농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탈농시켜야할 대상'이 아니라 생존해야 하고 보호받아야할 농촌의 주인이라는 시각으로 하루빨리 전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