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말하는 정치, 막가는 사회 |
| 2004년 11월 01일(월) 00:00 |
방랑시인 김삿갓이 황해도의 어느 서당에 들렀다. 훈장은 안에 있으면서 나와 볼 생각도 안하고, 문 밖을 내다보던 아이들 몇몇이 삿갓 쓴 꼴을 우습게 여기며 시시덕거렸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김삿갓이 읊었다는 시가 있다.
'학생은 곧 일찍 앎을 닦았는데, 선생은 와서 뵙지를 아니하도다. 방 안은 모두 귀한 것 투성인데, 학생은 모두 열 사람 못미쳤도다(學生乃早知, 先生來不謁. 房中皆尊物, 學生諸未十).'
우리말로 풀어보면 김삿갓의 괘씸한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한문 그대로 격한 소리를 내어 읽어야만 김삿갓의 분한 심정이 느껴지고, 이를 표현하는데 있어 얼마나 많은 육두문자가 섞여 있는지 곧 알게 되는 것이다.
한치도 양보없는 '막말사태'
시대를 지금으로 옮겨 우리네 국회의원들이 시골의 어느 학교를 방문했다고 가정해보자. 교장은 내다보지도 않고, 아이들만 웃고 떠드는 상황이 됐다면 '막가자는 것'일테고, 그 교장은 직을 유지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비록 육두문자로 가득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어였한 시 한 수로 분한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치고, 읽는 이에게는 예의없음을 깨닫게 하는 여유는 우리 국회의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시작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와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 사이에 벌어진 막말사태는 한치의 양보가 없다. 육두문자도 서슴없지만 그것이 섞인 욕의 카타르시스만으로는 분이 풀리지않는다. 총리직에 걸맞는 여유와 절제도 찾아볼 수 없다. 뿐 아니라 야당 의원들에게서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유럽순방의 객고를 풀기위해 마신 술 때문에 나온 '취중실언'이 아닌 평소의 소신이라 한나라당의 사과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당당하게 버티는 이 총리에게서 열린우리당은 대쪽 같은 기개가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차떼기당'이라는 치명적인 흠집이 건드려진 한나라당으로서는 도무지 감내하기 어려운지라 '파면권고결의안'과 '해임결의안'을 들고 나와야 할 판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는 퇴보한다"고까지 했으니 어느 한쪽이 거덜이 나야 막말사태는 끝이 날 수 밖에 없다. 덕분에(?) 정기국회가 파행을 겪는 사태에 이르러 이래저래 민생만 고달프게 됐다.
서로 인정하는 여유 아쉬워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막가파식' 정쟁은 사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뜬금없는 이념대립은 좌와 우 가릴 것 없이 어느 한쪽을 짓밟아 명줄을 끊어놓아야만 끝이 날 것처럼 극한 상황으로 내닫고 있다. 백년대계에 종사하는 교육주체들은 서로 불신하고 갈등하는데 있어 이미 정도를 넘어서 있다. 중병을 앓고 있는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도 그 처방을 놓고 격렬한 이념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이 나라다. 정국경색에 또 다른 태풍의 눈인 '4대 개혁법안'을 놓고는 그야말로 개혁과는 거리가 멀게 색칠되어 있음에도 대안은 내놓지않은채 "절대 안된다"식의 반발만 거세다.
구성원이 몇몇에 불과한 소조직이나 언어와 종족이 다른 국가공동체에 있어서도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위 아래 가릴 것 없이 갈등에 휘말리고 서로 불신한다면 파멸 역시 불가피하다. 그같은 갈등을 정당한 절차와 방법에 의해 담아낼 여력이 없다면 공멸의 시간은 더욱 앞당겨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열은 현재로서는 그것을 수렴해낼 수 있는 절차와 방법도 없을뿐더러 그 속에는 서로를 인정하지않는 날 시퍼런 비수가 감춰져 있어 두렵기까지 하다. 어느 한쪽을 딛고 일어서야만 다른 한쪽이 살 수 있다는 상극의 이 비수는 서로의 가슴팎을 겨눈채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게 지금 상황인 것이다.
정치인들이 자주쓰는 '유감' 표명으로 진정될 수 있는 사태를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욕설로도 해소할 수 없게 악화시킨 것은 분명 이 총리의 잘못이다. 총리의 사과를 국회일정을 재개하는데 볼모 삼아 버티고 있는 한나라당 역시도 거대야당답지 못하다.
우리 국민들이 거론하기조차 고달프지만 그야말로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 '상생'이다. 이 상생에는 서로를 인정하는 여유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정치권이 서로를 부정하지않는 상생의 길을 걷지못한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된 갈등과 분열은 치유될리 만무하다. 잘은 모르지만 정치라는 것은 사회적 갈등을 걸러내는 최후의 여과장치여야 하기 때문이다. 육두문자가 뒤섞인 질펀한 욕설 가득한 시조 한 수로 예의 없는 훈장을 깨닫게 하는 김삿갓의 여유와 지혜가 지금 우리 정치권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