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가지 않고도 영어가 가능한 나라

2008년 01월 24일(목) 00:00

　김영순 논설위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일이 끝나도 텅 빈 집에 들어가기 싫다. 그래서 느는 게 술이요, 쌓이는 게 몸 속의 병이다."
　이는 TV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 나오는 길억씨의 외침만은 아니다. 자녀의 조기유학을 위해 온 가족을 외국에 보낸 이 시대 기러기 아빠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드라마 속 길억씨는 최근 기러기아빠들의 가슴을 울렸다. 말라빠진 걸레를 볼 때 자신의 신세같았다거나, 아들의 생일이나 명절엔 공항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거나 하는 사연들을 토로하는 장면에서였다. 급기야 기러기 아빠로 뼈 빠지게 일하다 다시 몸을 상하게 된 길억씨가 가족들을 다시 외국으로 보낸 후 한강에 몸을 던지는 장면에선 기러기 아빠들은 물론 일반 시청자들의 눈시울까지 붉게 했다.
　최근들어 조기유학과 기러기 가족이 최선인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여러가지 폐해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기유학을 가는 이들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속을 들여다 보면 오히려 적응하지 못해 1,2년만에 돈만 낭비한채 되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 설령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받는 유무형의 스트레스와 피해가 막대하다. 3년째 기러기 아빠를 하고 있다는 직장인 김모씨는 5학년짜리 딸 아이에게 틱장애가 왔다고 걱정이다. 물론 미국에 가기 전에 한국에서 외국인학교에 수년간 보내 언어소통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현지에서 원어민들의 빠른 발음을 쉽게 캐치하지 못해 심한 고통을 받은 결과다. 이같은 소소한 장애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원형탈모증, 우울증, 왕따 등 그 종류가 많을 뿐더러 정도도 아주 심하다는 게 전언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요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나홀로 유학' 역시 부작용이 적잖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탈선방지가 힘들고 문화적 괴리감이 크며 물론 시간이 지날 수록 부모의 존재를 서서히 잊어가 정체감까지 상실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유학을 떠나는 초·중·고등학생의 통계가 한해 7천명에서 1만명. 하루 19명의 아이들이 조기유학을 떠나고 있는 셈이다. 국비 유출만도 한해 15조원에 이른다.
　이처럼 경제적 비용과 여러가지 고통, 그리고 문제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기유학 행렬이 줄을 잇는 것은 단연 영어 때문이다. 물론 국제적 감각과 견문 그리고 선진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부모의 희망이 부가적으로 뒤따르긴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고생하고 문제점이 속출한다 하더라도 유학 후 영어하나만 건져도 된다는 심정으로 자녀를 유학행렬에 내세운다.
　그 영어란 놈을 국내에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인가. 기러기 가족을 선택한 이들은 '없다'라고 대답한다. 조기유학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도 다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나온 방안이라고 큰 소리친다. 이들의 주장은 초등 고학년 때 가보았자 언어소통은 그럭저럭 가능할지 몰라도 원어민 수준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국제적 업무를 전천후로 소화하는데 별 지장이 없는 원어민 수준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려면 국내에서의 영어교육으론 가당치도 않다고 덧붙인다. 어릴수록 좋고 최소한 초등학교 4년 이전에 미국 땅을 밟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초등 저학년 때 기러기가족을 선택하게 된다는 논리를 편다.
　이쯤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영어를 건지기 위해 조기유학을 보내도 자녀와 그 가족이 겪을 고통은 적지 않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의 마음 역시 편치 않다. 자신들의 자녀가 영어에 있어선 뒤처질 것이라고 여기고 국내에서의 영어교육에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바람은 이렇다. 조기유학을 보내지 않고도 국내에서 영어를 해결할 뾰족한 수를 국가가 찾아내 제도화시켜주는 것이다. 대입자율화방안에 들어있는 영어시험의 변화가 그런 이상적인 제도의 첫 단추였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