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은 풀고 보호막은 걷고'

2009년 06월 11일(목) 00:00

　이춘성　수석논설위원/지역경제문화연구소장
　
　"실질적인 아시아 시대가 예고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고 시급하다. 우리 외교는 정상회담을 하든, 만찬을 하든 돌아오면 끝나버리는 외교였다. 올해는 아시아와 관련된 나라들과 정말 새로운 관계를 맺어 보겠다…."
　지난 3월 8일 뉴질랜드 호주 인도네시아 등 3개국 방문을 마무리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밝힌 '신아시아 외교구상'이다. '새로운 관계'에는 3개국을 포함한 아시아 모든 나라와의 FTA체결이 들어있다. 아시아 자유무역협정 네트워크의 허브역할을 우리가 맡겠다는 것이다.
　특정분야에 한정해 FTA 당위성이나 경제적 효과를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 줄 안다. 하지만 '아시아 모든 국가와 FTA체결'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절망에 가깝다. 아시아 모든 나라에는 중국도 포함되어 있고 '한·중FTA'가 농업에 미치는 파괴력은 한·미FTA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한농연중앙연합회는 "우리 농업·농촌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말할 정도다.
　쌀 관세화가 예고되어 있고, 모내기가 한창인 들녘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잿빛'이다. 농어업선진화위원회(지난 3월23일 출범했다)가 농어업부문에 대한 보조금과 각종 금융지원을 중단할 태세이기 때문이다. 보조금 축소 움직임은 올해 초 발표된 농업경쟁력강화방안에도 이미 담겨 있다. 인프라, 공동이용시설, 친환경녹색성장, 재해지원 등에는 집중하되 농업인 개인소유의 시설 및 장비구입 보조금은 지양하겠다는 것이다. 효과나 성과분석에 철저하기 보다 온정주의적 성격이 짙은 보조금정책이었던 만큼 부정과 비리의 여지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축소 또는 폐지를 거론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보조금 축소 또는 폐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시아 모든 나라와의 FTA체결이 농업보호를 위해 걸어잠근 모든 '빗장'을 푸는 일이라면 보조금과 금융지원 중단은 대다수 영세한 농민들을 사실상 지탱해온 '보호막'을 모두 걷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조금 가운데는 화학비료 보조지원, 송아지 생산안정제 처럼 농산물 생산비 절감에 직접 영향을 주거나 관련 산업기반을 유지시켜온 제도도 포함되어 있다. 농업인들이 생존권과 직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늘 그랬지만, 농업정책에 대한 현 정부와 농민들 시각에도 이처럼 큰 괴리가 있다. 중앙대 윤석원 교수는 이를 '농업·농촌·농민문제를 보는 역사인식과 철학의 재정립 차원'에서 분석한다. "농어업 선진화를 논하기에 앞서 농업문제는 농민만의 문제일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와 농업이 민족의 산업, 생명산업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여된 상황에서 제시된 "수출농업, 한식세계화, 1시군1유통회사 등은 틈새시장정책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빼놓지 않는다. 더 나아가 "농산물 수출국인 뉴질랜드가 지원하던 보조금을 없애는 것과 수입국인 우리가 농업에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보조금 중단으로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정부는 농업의 공공성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위기 때마다 예산을 들여서라도 농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뉴질랜드를 오히려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백번 생각해도 옳다.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을 처음 전파한 한국계 일본인 쓰지 신이치는 "농사에는 산업이나 경제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날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생명산업으로서의 농사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다. 정부가 농어업선진화를 내세워 기업농 육성에 주력한다면 중소규모 가족농이 맡아온 대부분의 농업분야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지않아도 식량과 에너지 위기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 와 있다. 안전한 먹거리 생산과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농업정책의 '대전환'은 그래서 더욱 시급하고 절박하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