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비명(epitaph) |
| 2009년 07월 09일(목) 00:00 |
이춘성 수석논설위원/지역경제문화연구소장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버나드 쇼), '에이 괜히 왔다'(중광스님),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헤밍웨이), '여기 쉬다'(빈센트 반 고흐), '살았고, 썼고, 그리고 사랑했다'(스탕달), '고로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데카르트),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칼 마르크스)…. 名士들의 묘비명(epitaph)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고대 로마인은 길 옆에 묘를 썼다. 최초의 로마식 街道이자 제국 존속기간 동방으로 가는 대동맥이었던 '아피아가도'를 만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그 원조다. 그는 아피아가도 옆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유언했다. 길 옆 묘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말을 주로 새겼다.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유명한 비문들이 시인들에 의해 지어지고, '에피그램(epigram)'이라는 문학 장르를 형성하기도 한다. 묘비명에 두고두고 새길만한 名言名句가 많은 것은 이런 연유다.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는 유언에 따라 세워질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에는 그의 어록이 새겨진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봉분 겸 비석으로 삼은 낮고 넓적한 너럭바위 형태의 자연석에 새겨질 이 비문은 '대중이 살아 깨어있어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은 성공 한다'고 갈파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을 떠올린다. 오웰은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를 풍자한 소설 '동물농장'에서 권력의 타락을 방조하는 무지와 무기력을 痛打한다. 그러면서 "권력에 맹종하고 아부하는 순간 모든 사회는 이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돌입 한다"고 경계했다.
일전에 지적했듯이 우리사회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관용을 모르는 좌우 양 극단에서 질러대는 목소리가 무지와 무기력을 강요하는 현실이 더 심각하다.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기 어려운 혼돈은 '침묵하는 다수'를 늘려가고 있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극한 대치정국도 혼란스럽다. '비정규직 2년 고용시 정규직 의무전환'을 골자로 한 비정규직법이 7월 1일자로 시행됐는데 '1년6개월 적용유예안'은 왜 필요할까?, '100만명 실업대란'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고, 비정규직 남발을 막는 장치를 마련하는게 더 급한 건 아닐까?, 그런데도 비정규직 문제를 보는 눈은 왜 언론마다 다를까?
언론인으로 살면서 항상 부끄러운 이유 중 하나는 언론만큼 진실을 외면하기 쉬운 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사명으로 여기는 '사실보도'도 진실과 거리 있는 경우는 종종 있다. 사실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닌 때문이다. 비정규직법에 대한 언론보도는 더욱 복잡하다. 진실에 필요한 사실은 꼭 제쳐두고 불필요한 사실만 늘어놓거나, 심지어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은 사실만 기사화하는 일이 잦은 때문이다.
언론에 비친 창을 통해 진실을 보려면 행간을 세심하게 읽거나 감춰진 기사를 찾아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비정규직법 논란의 진원지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추미애 위원장(민주당)이 지난 일요일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이 그렇다. '비정규직법 시행촉구'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는 그녀의 회견내용은 이랬다.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은 많은 서민과 젊은이들에게 잃어버렸던 꿈과 희망을 다시 찾아주는 첫걸음이다.…정규직 한번 되고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헛된 꿈이라고 해야 하는가.…'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하지 않고, 희망을 가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약자들에게 꿈을 믿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기회가 오는 세상을 지켜드리겠다…." 가수 인순이의 '거위의 꿈' 노래가사를 인용하며 소신을 밝히다 끝내 울먹인 그녀는 역시 '추다르크'답다.
고 노무현 대통령 49재가 이틀 뒤다. 그의 서거에 뒤늦게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를 외쳤던 이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다시 침묵이다. 낮은 너럭바위에 적힌 한줄 묘비명이 그래서 또 외로운 외침이 될까 걱정되기에 다시 적는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