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곡선(forgetting curve)'

2009년 08월 06일(목) 00:00

　이춘성수석논설위원/지역경제문화연구소장
　
　심리학자 에빙하우스(H. Ebbinghaus)의 '망각곡선(forgetting curve)'은 기억을 위해서는 반복학습이 절대 중요함을 강조한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에 반비례하므로, 점점 감퇴하는 기억을 장기적인 기억으로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망각곡선의 주기에 따라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반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 공부 잘하는 법'을 설명하는데 자주 거론되지만 그 과학적 가치나 타당성을 논할 생각은 없다. 장기적 기억으로 영구 보존된 결과물이 때론 진실에 배치된 경우가 많고, 꼭 기억해야할 소중한 것들도 너무 쉽게 망각되는 것 같아 문득 떠올렸을 뿐이다. 진실에 배치된 사실을 기억하거나 귀중한 것을 너무 빨리 망각하는 것은 자칫 한 나라의 역사까지도 돌이킬 수 없는 후퇴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수립 50주년 되던 해 한국갤럽은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을 조사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14.3%인 '김대중'을 47.9%의 압도적인 차이로 앞섰다. 자세한 수치는 기억에 없지만 얼마 전 한국 대학생들에 대한 조사결과도 같았다. 개발을 앞세워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지만 그 대한 기억은 이처럼 상반된다. 한국인의 이 같은 기억물이 훗날 정치행위로 표현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가장 돋보이게 성장한 분야는 단연 '인권'이다. 2001년 11월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진보와 보수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와중에서도 활동의 근본만큼은 국제적인 요건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4년부터는 한국이 인권 A등급 국가로 격상되기까지 했다. 대륙별 순번제에 따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맡게 된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 자리도 당당히 우리 몫이었다.
　이런 인권위가 요즘 국제 망신을 사고 있다. 당연직이나 다름없는 ICC 의장 출마를 포기한데 이어, 아시아인권위원회가 한국의 인권위 등급을 B등급으로 낮출 것을 ICC에 건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권등급이 B등급으로 낮춰지면 ICC 투표권도 잃게 된다.
　인권위 사태는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의 인권위 조직개편에서 이미 예고됐다. 1993년 12월 유엔총회서 채택된 '파리원칙'은 인권위 위상에 관해 이렇게 규정한다. "국가인권기구는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그 구성과 권한의 범위를 헌법 또는 법률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부여받아야 한다…." 행안부 조직개편안은 인권위가 준수해야할 국제적 요건을 명시한 이 '파리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아시아인권위원회가 한국 인권등급 하향조정의 이유로 "인권위의 인력이 30% 감축되면서 조직의 독립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을 받았고, 인권 경력이 없는 위원장을 차기 ICC 의장으로 내세우려다 포기해 국제사회의 신용을 잃었다"고 지적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뉴라이트'까지도 개탄하는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은 뭘까. 인권에 대한 무시 내지는 어렵게 얻어낸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의도적' 망각의 결과다. 10년을 못다 채운 인권위이긴 하다. 전 국민적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다. 하지만 군부독재와 권위주의정권을 거치며 고착돼가던 인권 후진국의 면모를 일신했다. 나라의 품격과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일이었기에 그 공은 지대하다. 장기적인 기억으로 영구보존하기 위해 당연히 반복 학습했어야 할 진실을 '잃어버린 10년'의 망각돼야할 역사로 폄훼한 결과가 이번 인권위 사태다.
　유시민은 '후불제 민주주의'서 "장기적으로 국가수준은 국민의 평균수준을 추월하지 못한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결국 시민 개개인이 각성하고 진보하는 만큼, 꼭 그만큼씩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고 썼다. 요즘 주요사안을 놓고 펼쳐지는 정치권의 설전(舌戰)을 보면 솔직히 어느 쪽이 진실인지 정말 헷갈린다. 하지만 혼돈이 아무리 극심해도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진실은 환하게 빛나는 법이다. 소중한 진실을 찾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각성하고 또 각성해야만 역사의 퇴행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