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의 노래’ |
| 2009년 12월 10일(목) 0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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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세월은 흘러가도/구비치는 강물은 안다/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일어나라 일어나라/소리치는 피맺힌 함성/앞서서 나가니/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0년 12월 백기완이 쓴 시 ‘묏 비나리’ 일부다. 출감하며 내놓은 이 장시(長詩)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된 것은 1982년 망월묘역에서 열린 윤상현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계기다. 추모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가 기획되면서 이 노래굿의 마지막에 ‘묏 비나리’를 원작으로 소설가 황석영이 각색하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가 등장한다. 이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최근 노동현장과 교육현장 등 곳곳에서 수난(?)을 당하던 이 노래가 급기야 ‘5·18 추모곡’의 자리도 내줘야할 처지가 됐다. 국가보훈처가 내년 5·18 광주민중항쟁 30주년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닌 새로운 5·18 추모곡을 연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30주년에 걸 맞는 추모곡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국민공모를 거쳐 5월 단체와 시민의견을 반영한 가사를 선택한 뒤 내년 2월 작곡가협회 등 공인단체에 곡을 의뢰해 추모곡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달 중에는 5월의 노래 제정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여론조사도 계획되어 있다. 5월 3단체는 “추모곡 선정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만큼 일단 제작과정을 지켜보고 시민의견을 듣겠다”고 사실상 수용의사를 보인 모양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퇴출 가능성은 그래서 더 높아 보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이 법정 국가기념일이 된 1997년 이래 지금까지 ‘공식’ 추모곡의 역할을 했다. 어느 누구도 이 노래 외에 다른 곡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추모곡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국가보훈처가 갑자기 ‘5월의 노래’를 만들겠다고 나선 이유는 과연 뭘까? 역대 대통령 가운데 5·18 기념식에 처음 참석한 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목청껏 따라 불렀고,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에서도 연주되고 불러졌던 노래였다. 하지만 5·18 30주년 기념식에서는 불러지면 안되는 이유는 뭘까?
행정자치부가 ‘민중의례’를 강행한 공무원노조 간부들을 징계조치하겠다는 것이나, 서울시교육청이 ‘민중의례 금지공문’을 일선 학교에 보낸 취지가 선뜻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민중의례에서 불러지는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니 보훈청의 5월의 노래 제정 취지와 어쩌면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내년이면 30주년인 5·18이 아직도 역사적 사실로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데만 17년이 걸렸고, 교과서에까지 실렸어도 ‘5월의 역사’는 여전히 좌편향으로 매도되는 현실이다. ‘5·18도 5·18 묘역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으로 보는 조갑제·지만원식의 발상이 아직도 버젓이 온·오프라인 세상에서 판을 치는 형국이야말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시키고 있는 주범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30주년인 내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박제(剝製)된 기념일’을 막는 일이다. 새 ‘5월의 노래’는 ‘5·18 박제화’의 단초일 수 있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추모곡의 자리에 계속 두려면 누구나 목청껏 부르는 노래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왜곡되어가는 5월 역사 바로 잡기는 필수적이다. 광주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억을 지우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막아내지 못하면 내년 30주년은 5·18이 잊혀진 첫해가 될지도 모른다. ‘산자’들의 책임은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