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해를 넘기며 이 춘 성 수석논설위원/지역경제문화연구소장

2009년 12월 24일(목) 00:00

　해가 진다. 더듬어보니 올 세밑은 유난히 아릿하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소중한 이들과 덧없이 이별해야 했다. 탄식하고 분노한 일도 많았다. 서민들 애옥살림은 불황에 더욱 힘겨웠다. 다사다난(多事多難).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지만 아무래도 이로는 역부족이다.
　시간은 역시 성속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해 초사흘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점거농성으로 시작된 정치판은 여기서 예외였다. 여야의 팽팽한 대치에 다시 전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시간의 흐름이 멎은 유일한 곳이지 싶다.
　철거민 5명이 불에 타 숨진 ‘용산참사’도 새해 벽두 일어난 일이다. 온전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두 번째 겨울을 넘긴다. 유시민이 말했던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부정한 시대’는 올 한 해도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들자니 무겁고/놓자니 깨지겠고//무겁고 깨질 것 같은 그 독을 들고 아등바등 세상을 살았으니/산 죄 크다//내 독 깨뜨리지 않으려고/세상에 물 엎질러 착한 사람들 발등 적신 죄/더 크다.’
　시인 김용택의 ‘죄’가 생각나는 건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때문이다. 평생을 ‘바보’로 살다 육신까지도 베풀고 떠난 그에게서 배울 일은 뉘우침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다.
　5월에 떠난 노무현 대통령은 온 국민의 마음속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거기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고 새겼지만 ‘민주의 가치’는 희미해져만 간다. 내년엔 깨어있는 시민이 훨씬 더 많았으면 싶다.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서럽고 캄캄하고 한 많은 세상을 후손에게 넘기지 않고 자유가 들꽃같이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통일에의 꿈이 무지개처럼 솟아오르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이 중심이 되어 투쟁할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뙤약볕 내리쬐던 8월 김대중 대통령도 그의 ‘반쪽’을 따라가며 이처럼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 화합을 강권하며 떠난 그의 당부 역시 기억 저편에 가물가물하다. 돌아가 다시 피를 돌게 하고 싶은 기억들이 자꾸 망각의 늪에 빠져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교수신문은 올 한 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빗대 ‘방기곡경’(旁岐曲逕)이라 했다. 바른길을 좇아 정당하고 순탄하게 일하지 않고 ‘샛길과 굽은 길’로만 돌아갔음을 비판한 것이다.
　세종시, 4대강사업, 미디어법 등등. 따져보면 굵직굵직한 정책 모두엔 민의의 수렴은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당연히 타협과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공론(公論)이 허락하지 않아도 ‘방기곡경’을 찾아 억지로 들어가려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던 율곡의 가르침을 나라 지도자들과 정치권은 되새기고 또 되새길 일이다.
　한 해의 끝자락은 인간 스스로 만든 세월의 매듭일 뿐이지만 늘 아쉬움이다. 아직도 곳간 가득한 애물단지 나락포대 때문에 시름에 젖은 농민들, 올 한 해 자나 깨나 가슴 졸이며 고단한 삶을 이어온 서민들은 그래도 새로 얻은 달력에 ‘희망’을 쓴다.
새해엔 탄식하고 분노하는 일이 없기를,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하지 않기를, 신종플루 같은 질병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우리 정치가 제발 바르고 큰 길로 복귀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내년엔 서민들이 당당히 주인 되는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