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에 쌀 대신 콩을 심으면… 이 춘 성 수석논설위원/지역경제문화연구소장 |
| 2010년 04월 22일(목)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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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병원에 갈일’이란 장기기증에 시신기증까지 육신을 미리 기증해놓았으니 죽으면 곧바로 전남대병원에 실려 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왜 그리 약한 말씀만 하시느냐’ 반문했지만 심정은 이내 이해가 갔다. 방울샘 옆에 손수지은 ‘쌀의 집’, 시험을 위해 이 논 저 논 심어놓은 ‘수복’이며 ‘거대배아미’ 등 신품종 벼와 호박이 자라는 모습 등을 더는 지켜볼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수년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갑작스런 취재요청을 받고 ‘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김 지사는 그동안 낙향해 고품질 쌀 생산에 매달려오면서 수집해놓은 자료와 정보망을 활용해 ‘쌀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도지사를 비롯한 각계각층에 호소문과 탄원서도 냈다. 하지만 묵묵부답,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데려간 곳이 마을 어귀 양지바른 선산 한 편에 미리 세워놓은 그의 묘비였다. 특유의 너털웃음과 함께 보여준 묘비에 적혀있던 글귀는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평생 농민의 행복을 찾아 헤매이다 아쉬움만 남아 여기 누워서도 농민의 행복을 기원하노라”
함평 ‘나비쌀’, 해남 ‘한눈에 반한 쌀’, 장성 ‘꿈의 쌀’ 등 전국적 명성을 얻은 전남 고품질 쌀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 지사다. 하지만 더는 새 쌀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정신은 또렷한데 육신이 지탱해주질 않아서다. 농민행복을 위해 할 일이 태산인데 ‘쌀의 집’을 떠나야 한다. 더구나 생의 마지막 거처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 오죽 외롭고 아쉬울까….
노농(老農) 김재식 지사는 내게 늘 “쌀농사는 농민의 생명산업이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 생명산업인 쌀농사가 올해부터 그 근본이 바뀐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정부는 과잉생산에 따른 수급불균형이 구조화됐다며 올해부터 ‘감산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논에 쌀 대신 콩과 밀 등 다른 작물을 심겠다는 뜻이다. 관계공무원은 “논에 다른 작물의 재배를 확대하기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공언했다. 정부 감산정책의 기조에 엿보이는 ‘불도저’의 강한 의지가 살벌하다.
양곡정책이 ‘감산정책’으로 전환되는 것은 ‘통일벼’로 상징되는 녹색혁명이 시작된 지 40여년만의 일이자, 품질 고급화로 전환한지 10여년만의 일이다. 당연히 생산주체인 농민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의견수렴이 필요하지만 빠져있다. 재고량 때문이라지만 중단된 ‘대북지원’ 등의 수단은 아직 써보지도 않았다. 양곡정책의 전환은 그래서 섣부른 판단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논에 쌀 대신 콩을 심으면 더는 논이 아니다. 논은 일단 훼손되면 돌이킬 수 없다. 섣부른 감산정책은 그래서 위험한 발상이다. 논이 가진 생태·환경적 기능은 차치하자. 하지만 포상과 국고지원 등 정부가 내세운 인센티브는 농민·지자체로 하여금 드넓은 논을 밭으로 만들게 할 것이고, 생산이 줄면 쌀에 의해 가까스로 지켜지고 있는 우리 ‘식량주권’까지도 위태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올봄 계속된 저온현상과 일조량 부족은 예상치 못한 재해로 쌀도 생산량이 격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80년 냉해로 쌀 생산이 격감한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식량난은 이미 국제사회의 고민이다. 이 마당에 섣부른 양정의 변화는 필리핀이 겪고 있는 ‘쌀의 복수’를 부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노는 논에는 ‘수복’을 심으면 돼. 베어내서 사료로 쓰면 되거든. 논도 기름지게 보전할 수 있고 사료걱정도 덜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내가 아는 노농(老農)은 벌써 수년 전부터 휴경(休耕) 논을 어떻게 관리할지 고민했었다. 논을 밭으로 만들어 콩을 심고 밀을 재배하자는 것이 아니라 수확할 필요가 없는 벼를 심어 기름지게 가꿀 궁리를 했다. 고품질 쌀을 생산하는 일이야말로 농민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그는 정부의 갑작스런 감산정책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수일내로 찾아뵙고 고견을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