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람들] “오순도순 책 읽고…글 쓰고…마음 나눠요” 전라도 전라도 사람들 / <8>김재형 곡성 죽곡농민열린도서관장 2004년 도서관 개관…보유장서 1만권 넘어 마을 주민들이 쓴 시(詩) 모아 시집 발간도 귀농인생 20년 농촌공동체 복원 위해 최선 /오경은 기자 white@kjdaily.com

2012년 03월 02일(금) 00:00

김재형 관장은 평범한 시골마을에서 도서관을 운영하며 농민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마을시집을 펴내는 등 농부들과 소박한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 가고 있다.

<題字-담헌 전명옥>
산골마을 촌사람들이 시(詩)를 쓴다. 평균 나이 70대. 뇌출혈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88세 할머니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8살 꼬마 아가씨도 시를 쓴다. 끼적끼적 흉내만 내는 게 아니다. 운율이 있고, 심상도 드러난다. 순수하고 소박한 꿈도 있다. 얼마 전엔 마을 시집까지 냈다. 비공식 등단 시인들이 가득한 곡성군 죽곡마을 이야기다.
곡성군 죽곡면 태평리. 사방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서 보성강과 섬진강이 흐르는,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의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수상한’ 도서관이 있다. 바로 ‘죽곡농민열린도서관’. 외형적으론 책이 가득한 도서관이지만 이곳은 단지 책 읽는 공간만이 아니다. 도서관 기능은 마을주민들이 하는 활동의 배경 정도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한데 모여 강의를 듣고 토론도 한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영화도 본다. 그렇게 이들은 도서관 안에서 하나가 된다. 지금은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는 옛 시골 공동체의 모습이 그대로 이곳에 있다.
이 산골마을에 도서관이 생기고 주민들이 시를 쓰는 문화인으로 거듭나기까지에는 김재형(48) 죽곡농민열린도서관 관장의 노력이 컸다. 중요한 것은 이 도서관을 통해 주민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마을 공동체’가 건강하게 복원됐다는 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일이었다.

“우리 마을 도서관은 사랑방입니다. 마을주민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내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는 지역 공유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김 관장은 10년전, 우연히 여행을 하던 중 죽곡마을과 인연을 맺었다. 그저 농민이 되고 싶어 대학졸업 후 25살 때 부터 귀농을 한 그였다. 맨 처음 경기도 화성에 있는 두레마을 공동체에 들어가 2년간 생활을 한 그는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한 뒤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도시서민으로서 살아가기에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이었지만 메마른 도회지의 삭막함을 견디기가 무엇보다 힘들었다. 그래서 1996년 다시 홍성에서 5년을 농민으로 살았다.

“2001년에 조금 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집사람이 그때 참 많이 힘들어 했었습니다. 그래서 삶을 바꿀 필요가 있겠다 싶었죠. 아내와 함께 여행을 했고 이곳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죽곡마을에 터를 잡은 지 2년째인 2004년. 김 관장이 마을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도서관 만들기였다. 어찌됐든 주민이 한데 모일 장소만 마련하면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공간이 없어 10평 쯤 되는 농민회 사무실에 책을 꽂기 시작했다. 30여명의 농민회 회원들이 팔을 걷어 붙였다. 마을 주민들도 집에 있는 책을 가져왔고 공공도서관에서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모인 책이 5천여 권이나 됐다. 농민회 사무실이 책으로 가득 찼다. 책이 늘어나자 김 관장은 2006년 ‘희망의 작은 도서관’ 사업에 응모했다. 그리고 당선금 1억원으로 79㎡(24평)짜리 번듯한 도서관을 짓게 됐다. 보유 장서만도 1만권이 넘는다.

“보통 농촌에 있는 도서관의 경우 단체가 마음을 모아서 하는 것도 있고 개인, 지방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있는데 우리 마을 도서관은 주민들이 마음을 낸 것 입니다. 그래서 단독 결정이라는게 없어요. 어떤 결정이든 모두 함께 결정합니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명사들을 초청해 농민인문학 강좌를 열어 농민들의 문화적 자생력을 키우고 있다.

홀수 달 첫째 금요일은 도서관에서 죽곡마을 운영위원회가 열리는 날이다. 농민회, 청년회, 부녀회, 생활개선회, 경영인회, 학부모회 등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통해 의견을 나눠 결정한다. 여기서 주민들은 만나고 싶은 강사도 추천한다. 그렇게 도서관에서는 청소년 공부방, 영화상영, 전시와공연, 인문학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도서관이 지어지자 김 관장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바로 시를 쓰는 것. 김 관장이 만든 인터넷카페에 주민들이 간간히 시를 올렸는데 놀랄만한 실력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를 모으기 시작했다. ‘좋은 시’를 모으기 위해 원고료도 내걸었다.

“동네주민들과 문집을 만들고 싶은데 솔직히 수필을 쓰라고 하면 너무 어렵잖아요. 시는 10줄 정도만 써도 시가 됩니다. 자기 이야기를 짧게라도 표현해보면 되겠다 싶었죠. 의외로 농민들이 짧은 말을 아주 잘 쓰거든요. 그리고 그 속에 삶이 있습니다. 짧지만 의미를 담아 써야하는 시를 농민들이 연습하면 수필, 소설 등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선택은 주효했다. 마을주민들이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험을 통한 아주 구체적이고 맛깔스러운 시들이 탄생했다. 본격적으로 시집을 내기 위해 지난 연말 출판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전문 사진작가가 와서 마을 주민들의 사진도 찍었다. 시집은 2천권 찍었다. 그런데 벌써 1천500권 이상이 팔렸다. 일반적인 시집보다 2배 이상 팔린 셈이다. 시집에 있는 시를 노래로 만들고 싶다는 사람도 생겼다. 김 관장과 주민들은 기회가 된다면 조그마한 음반도 제작할 예정이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마을공동체의 본보기’가 됐다. 그리고 죽곡마을시집은 새로운 농촌문화를 만드는 문예운동이 됐다. 하지만 김 관장은 자신은 한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동안은 농촌사람들에게 ‘계기’를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일 뿐. 쉽지 않았지만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란다.

“원래 농촌사람들은 근원적으로 스스로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라든지 여유로운 마음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제가 없는 것을 끄집어 낸 것이 아닌거예요. 모두 갖고 있었던 건데 계기를 못 만난 것 뿐입니다.”

그는 작금의 농촌 현실에는 ‘통합형 모델’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지역아동센터, 저소득층 지원, 노인프로그램, 보건의료원, 다문화가정지원 등 농촌의 복지기능이 많아졌지만 사람이 없어 단일프로그램이 자기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없는데 기능까지 분할돼 있으니 역할을 못하는 건 당연지사. 죽곡열린마을도서관은 어쩌면 이 모든 게 한 공간에서 가능한 통합형 모델인 셈이다.

김 관장은 요즘 고민이 있다. 도서관 운영을 위한 예산을 받기 위해 청소년공부방 사업계획서를 쓰고 있는데 내년 목표를 어떻게 쓸 것 인가에 대해서다. 한참을 생각한 그는 목표에 ‘문 안 닫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쓰겠단다. 여기서 ‘유지’한다는 건 예산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솔직히 마을 주민들과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산골 작은 마을인지라 누구 한명이 도드라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주민들도 있을 터다. 그래서 김 관장은 죽곡마을에 산지 어느덧 10년째이지만 아직도 조심스럽단다.

그는 매일 도서관 근처에 흐르는 보성강을 보러 나간다. 그리고 기도한다. 잘 극복하게 해달라고…. 오늘도 우리 농민들이 절망하지 않고 다 같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글=오경은 기자 white@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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