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람들] 남도 대표 한옥마을 이제 ‘엿’으로 뜬다 전라도 전라도 사람들 / <9>박향숙 보성 강골영농조합법인 대표 시골 모습 간직한 영화·TV 단골 촬영지 각광 5년 전부터 주민 공동으로 ‘엿 만들기’ 사업화 “원형 지키면서 어울려 사는 생활공동체 구현” /이경수 기자 kspen@kjdaily.com

2012년 03월 09일(금) 00:00

박향숙 보성 강골영농조합법인 대표

<題字-담헌 전명옥>


멀리서 바라보니 짙은 대나무 숲에 검은 기와를 얹은 한옥의 지붕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니 정갈하게 쌓인 돌담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졌다. 짙푸른 담쟁이넝쿨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단아했다. 봄바람이 곁을 스치자 댓잎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운치를 자아냈다. 느긋하게, 기웃기웃 골목을 걷다보니 1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은 이렇게 옛 빛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제법 규모 있는 오래된 한옥 30여채가 오봉산을 안고 오순도순 모여 있는 남도의 대표적인 ‘한옥마을’이다.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옥이 중심에 자리잡고, 곁에는 초가집이 정겹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골의 옛 모습을 간직한 강골마을은 영화와 TV프로그램 단골 촬영지가 되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곳의 한옥은 툇마루와 댓돌에서 마당의 우물, 군불 때는 아궁이까지 흑백사진 같은 생활 풍경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서, 마을 안에 있는 이금재 가옥, 이용욱 가옥, 이식래 가옥, 열화정은 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을 만큼 유서가 깊다. 덕분에 강골마을은 한옥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는 체험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유명마을로 자리잡았다.


아름다운 이 마을은 지금 ‘엿’으로 또 한번 뜨고 있다.

오래된 한옥을 지켜온 것처럼, 전통문화 보존에 관심을 쏟다 예부터 전해오는 방식대로 엿과 조청을 만들었는데 이게 도시인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인기몰이중이다.

이제는 마을 주민들이 아예 조합을 만들어 공동 생산·판매에 나서고 있다. 강골영농조합법인이라는 이름을 내건 생활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이제 갓 40대를 넘긴 젊은 여성 박향숙 대표다.

박 대표가 강골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곳이 탯자리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바로 정착했다.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좁은 골목길도, 돌담도, 그리고 작은 냇가도 모두 정겨웠다. 꼭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푸근했다”고 첫 느낌을 말했다. 그녀는 가장 나이 어린 마을사람으로 구성원이 됐다.

마을이 맘에 쏙 든 그녀는 마을을 지키고 싶었다. 사회운동에 열정을 쏟는 남편과 함께 마을을 잘 가꾸자고 약속했다. 거의 일흔이 넘은 노인들만 남은 마을이었지만 한옥과 정자, 그리고 대숲과 솔숲이 어우러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보물’을 간직한 마을이기에 자신이 있었다.

보성군 득량면 강골마을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남아 있는 고택을 문화재로 보유한 남도의 대표적인 한옥마을이기도 하다.

그런 맘을 갖게 되자 마을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2008년 2월엔 마을 이장을 맡았다. 당시 그녀는 보성군에서 가장 젊은 이장이었다. 그것도 여성으로….

마침 향수를 자극하고 직접 느껴보는 농촌체험관광 ‘붐’이 일면서 강골마을이 입소문을 타게 됐다. 워낙 좋은 자원을 갖고 있기에 가만히 있어도 관광객이나 답사객들이 찾아왔다.

젊은 여성이장은 마을을 찾는 손님들을 도맡아야 했다. 자연스레 동네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해설사가 됐다. 그녀는 골목이 살아있는 마을, 화려하게 복원하지 않는 마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박 대표는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또 뜨뜻한 구들이 있는 시골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려는 도시인들이 늘어갔지만, 마땅한 체험거리가 없어 늘 고민이었다. 시골밥상을 제공하는 등 농촌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게다가 동네사람들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일하면서 정을 나눌 수 있는 일거리가 필요했다.

고민하는 그녀에게 ‘엿’이 눈에 들어왔다. 너른 간척지를 갖고 있는 이 마을에서는 겨울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엿을 고았다. 솜씨 좋은 ‘달인’도 여럿이었다. 특히 엿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손으로 맞잡고 밀고 당기면서 만들어야 하기에 협력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간식거리로, 가용으로만 활용하지 말고 동네사업으로 확대시켜 일자리도 창출하고 돈도 벌었으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명품 엿을 빚어낸 강골마을 사람들이 공동작업장에서 정성들여 ‘쌀눈 엿’을 만들고 있다.

5년 전부터 공동작업에 돌입했다.

강골마을의 엿은 ‘쌀눈 엿’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쌀이 귀하던 시절, 하얀 쌀 대신 쌀눈이 섞인 쌀을 사용하던 검소함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원료는 득량만 간척지에서 생산한 ‘명품 쌀’로 충당한다. 엿기름도 직접 기른다. 불의 강약을 조절하며 5시간 이상 고아 조청을 만들고 더 단단한 갱엿이 되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200번 이상 당겨야 하얀 빛으로 변하면서 엿이 탄생한다. 편리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 과정을 손으로 하기 때문에 이곳 쌀눈 엿은 몸통에 구멍이 송송 나고 바삭바삭해 이빨에 달라붙지 않는다. 단맛도 적당하고 먹고 난 뒤 입안이 개운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간식거리로 사랑받으면서 판매량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어느 정도 돈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자, 더 욕심을 냈다. 체계적인 생산·판매를 위해 지난해 4월 강골영농조합을 출범시켰다. 사회적기업의 전단계로 시작한 영농조합은 일단 10명의 조합원으로 시작했다.

조합이 활성화되려면 누구나 적극적으로 일을 해내야 하기에, 그래도 마을에서 젊다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70대가 5명으로 절반을 차지하는데, 다행히 40대 2명이 동참했다.

엿 만들기는 농한기인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겨울 한 철 진행한다. 엿을 팔아 얻은 수익금은 동네사람들이 한데 모여 밥을 먹는 공동급식비로 활용되고 있다.

박 대표가 마을 공동급식에 유독 관심을 쏟게 된 계기가 있다.

“10여년 전, 어르신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동네사람들이 전혀 몰랐다. 노인들이 자기 집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이웃에 큰 일이 났는데도 낌새조차 차리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하루 한 끼라도 동네사람 모두가 모여 식사라도 하면 안부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엿을 만들어 파는 덕분에 이제는 공동급식은 걱정 없이 계속할 수 있게 됐다.

마을이 점점 알려지면서 전통문화체험을 하려는 탐방객들이 늘고 있지만 박 대표는 여전히 시골스러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옥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려는 희망자들에겐 아예 ‘불편한 하룻밤’을 선사한다. 화장실 등을 개수한 다른 한옥마을과 달리 여기서는 재래식 화장실과 우물 등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불편하더라도 옛사람들이 살던 대로 한옥살이를 체험해보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에, 관에서 수백억원을 지원해 민속촌처럼 꾸미겠다는 ‘유혹’이 되레 걱정이다.

박 대표는 “조금은 불편하지만 풋풋한 인정이 살아 있는 시골마을이야 말로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삶의 활력을 재충전하는 토양이 된다”면서 “편리함만을 좇지 않고 원형을 지키면서 동네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생활공동체로 만드는데 더욱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글=이경수 기자 kspen@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