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사람들 최재운 수필가 /대구일보 제공

2012년 06월 20일(수) 00:00

깜짝 놀랐다. 알록달록한 옷에 테가 넓적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두 눈과 콧구멍만 내 놓은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다가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불쑥 내밀면서 무어라고 소리를 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버스 기사가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잠시 앉아 기다리시라니까요.” 라고 질책하자 내민 손을 거두고 기사 뒷자리로 돌아갔다. 뜻밖의 사태에 한동안 어리둥절했다가 사태를 파악하고 정신을 차렸다.

교통카드 없이 버스에 오른 승객이 만 원짜리를 낸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요금을 내고자 올라오는 승객들에게 천 원짜리로 바꾸어 줄 수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요새 웬만한 결제는 카드로 하고 있으니 천원짜리를 열 장이나 넣고 다닐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버스에서 내렸지만 복면강도처럼 보이던 깡마른 여인의 그 섬뜩한 두 눈이 지금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 아침에 신간 서적도 알아볼 겸 시내 중심가를 찾아 나섰다가 기분을 망쳤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뜸했었다. 벼르고 벼른 나들이였으니 더욱 그랬다. 매일 출퇴근 시간에 시내버스 창으로 내다보곤 했었지만, 중앙로 거리를 직접 밟으면서 젊은이들 속에 섞여 활기찬 공기를 마음껏 마실 계획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학창시절의 빛바랜 추억을 되씹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려보기로 당찬 꿈을 꾸고 있었다.

마스크의 용도는 다양하다. 겨울철 추위를 이기기 위한 방한용, 농부가 농약을 살포할 때 농약 흡입을 막기 위한 방독용, 외과의사가 메스를 들 때 착용하는 수술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이다.

황사나 병원균의 침입을 막아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염용 혹은 제독용 마스크도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여성들이 많이 착용하는 건강 마스크가 특별히 두드러진다. 강변이나 공원 등지에서 조깅하거나 달릴 때 많이들 애용한다.

집 근처 야트막한 야산에 두어 시간 걷기에 적절한 산책로가 있어 가끔 오른다. 여성들 중 상당수는 완전무장을 하고 나타난다. 장갑에 큰 테 모자는 기본이고 눈과 콧구멍만 내놓은 두 겹 혹은 세 겹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그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마음대로 노려본다는 데 있다. 이쪽은 속수무책으로 완전히 개방된 상태인데 그쪽은 모든 걸 철저히 감추고 있으니 불공평을 넘어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 속에서 바람소리, 새소리에 취하러 왔다면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은 어떨까.

건강 마스크가 어떤 탁월한 기능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모든 걸 감추고 숨기려면 차라리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햇볕에 피부가 노출되어 상할까 두렵다면 바깥출입을 자제하거나 외출 시 선크림 정도 바르면 될 것이다. 과도하게 방어적이면서 얻는 것이 무얼까. 지나친 자기 보호 본능 탓은 아닐까.

버스에서와 비슷한 낭패를 공원에서도 가끔 당한다. 온몸을 감추고 지나가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서 뭣하겠는가. 예리한 눈초리로 날 훑어보든 째려보든 개의치 않고 지나친다.

그런데도 뜻밖의 기습공격을 받는 수가 있다. 마스크도 벗지 않은 채 불쑥 말을 걸어온다. 무슨 특출한 재주가 있어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알아보겠는가. 당황하여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그때서야 무장을 해제하고 본색을 드러내며 인사하니 딱한 일이다.

괜히 아는 채 했다가 번거로워 질 것으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법석떨기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여성이 더욱 그럴 것이다.

스스로 장막을 치고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을 구태여 찾아내야 할 명분도 없으니 단념하는 쪽이 마음 편하다. 상대방이 알아보든 말든 면죄부를 받은 셈이 아닌가. 괜히 긁어 부스럼 일으킬 이유가 없다. 마스크가 성가심을 덜어주니 오히려 다행이다. /대구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