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임란 포로로 끌려가 日에 유학 전파 ‘제2의 왕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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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07월 19일(금)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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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앞두고 ‘무등산 의병길’에 대한 문의가 많다. 무등산 의병길은 우리 선조들이 의병활동 시 다녔던 풍암제에서 제철유적지까지의 옛 길을 문화탐방코스로 재현한 구간으로 새로운 탐방로 조성보다는 옛부터 이용해 왔던 생활길 위주로 복원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생태계 훼손이 되지 않도록 자연지형에 맞게 최소 폭으로 정비돼 찾는 이들이 많다. 의병길 구간 곳곳에는 풍암정, 치마바위, 사당소(瀉塘沼), 무등산장, 제철유적지 등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있는 문화자원들이 풍부해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체험이 제공된다.
숭고한 무등산 의병정신, 원효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사색과 정취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무등산의 대표적 탐방코스인 무등산 의병길에서 느껴지는 의로운 기운은 남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무등산 정상에서 영광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영광 불갑산 근처에 무등산 기운과 맞닿은 또 한 명의 선비가 있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1567-1618)이다.
그동안 역사의 안개 속에 뿌옇게 가려져 그 업적이 희석됐던 수은 강항이 우리 앞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간양록’이라는 드라마와 조용필의 애끓는 주제곡이 퍼지면서부터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잡혀가 일본 주자학의 비조가 된 선생의 업적을 새긴 비가 영광군 염산면 하논 부락에 세워져 일본과 학계의 관심을 모았고 일본에서 ‘유학자 강항과 일본’이라는 연구서가 출간돼 그의 위치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억력이 뛰어나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유년기록이 있다. 16세에 향시에 합격 1588년 진사가 되었고, 1593년 27세 때 문과에 급제 이듬에 봄에 교서 정자가 되었다.
1597년 공·형조 좌랑으로 승진, 그 봄에 휴가를 얻어 고향 유봉에 와 있다가 정유재란이 터지자 분호조참판이 되어 전라도 군량미 수송책임을 지게됐다. 때마침 전세는 불리해 7월에는 한산섬의 관문이 무너지고 8월에는 호남의 중심인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에 돌아와 김상준과 더불어 여러 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모여든 수백명의 오합지졸들은 왜군이 육박해 온다는 소문을 듣자 모두 흩어져버리고 왜군은 영광군 근경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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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두 척에 나눠 탄 그의 가족들은 여러 날을 영광 앞바다에서 헤매다 결국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기로 작정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짙은 안개 속의 왜군들이었다. 그와 일가족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심은 얕았고 그들은 왜놈들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끌어 올려진다. 그 와중에 강항은 어린 자식들을 둘이나 잃고 만다.
왜군선에 옮겨진 수은은 장인이 결박을 풀어주러 밤 중에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왜병들이 날쌔게 건져내 통밧줄에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됐다. 이때 수은은 혈육으로 하나 뿐인 아들 용과 첩의 소생인 딸 애생이 배 안에서 수중고혼이 되었고 첩도 이에 침식을 잃고 분해하다 끝내 세상을 등졌다. 또 종형의 아들이 배탈이 나자 왜병은 그 아이를 산채로 물속에 던져버렸다.
‘간양록’은 이 시절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은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들려온다. 그 소리마저 시들어질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중형의 아들 ‘가련’이마저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들이켰다가 토하고 설사를 하자 왜놈들이 바다에 던져 버렸다. 여덟 살의 가련이는 아버지, 엄마를 부르며 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 선 존재의 한없는 무력함이란 얼마만한 깊이로 떨어지는 것일까?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녹아 버릴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는 살아남은 아비의 목숨을 던져 버리기 위해,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 본토에까지 끌려가고 만다···’
생포된지 9일만에 왜선은 순천 좌수영에 이르러 큰 군선에 옮겨 일본 압송길에 올랐다. 닥치는대로 죽이는 판국에서도 벼슬아치나 기술자만은 어떻게든 살려서 본국으로 데려갈 심산이었다. 순천항을 떠난지 8일만에 배는 일본 이요에 입항했다. 이곳에서 오사카에 옮겨지고 얼마후 일본의 수도 교토 후미시성에 들어가 일본의 지식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과 교제 했는데 그중 일본 주자학파의 선구자로 일본 유학사상의 중요한 역사적위치를 차지한 후지하라와 깊은 교제를 갖기 시작했다.
문벌이 높은 문인학자였던 강항은 왜의 땅에서도 지방 토호의 보호 속에 일본에 퇴계학(退溪學)을 전한 유학의 스승이 되었고, 그 옛날 백제의 왕인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던 뱃길로 그는 다시 조선 유학의 씨를 뿌린 제2의 왕인박사였다. 애초의 시작은 조선에 돌아갈 배를 사기 위한 금전 마련에 있었으나 강항은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탄하여 암기하고 있던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는 등 후지와라 세이카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이를 통해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시대의 통치이념으로 유학을 도입한 일본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유학의 계통을 이황-강항-후지와라 세이카-야마자키 안 사이로 본다.
그러나 4년이나 이어진 포로 생활 속에서 당연히 고국을 향한 망향과 도망할 노력이 이어졌고, 가등청정에게 잡혀 풍신수길에게 보내졌다는 무관 이엽(李曄)이 도망하다 잡혀 자결하며 남긴 한 편의 절명사(絶命辭)에 큰 감명을 받았다.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恨)이 금방 길어지고/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아내는 낮 촛불처럼 아침볕에 곡을 하리./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 게고/ 대대로 지킨 선영(先塋)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모두 다 삼한(三韓)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어찌 쉽게 이역에서 우양(牛羊)과 섞이리’
전라 좌병영의 종3품 우후(虞侯) 벼슬로 포로 된 이엽은 고국 동포들과 결탁하여 배를 사서 하관(下關)까지 가서 왜적의 추적을 받자, 칼을 빼서 자결하며 이 시를 남겼다고 했다. 강항은 이 시를 얻어 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이렇게 차운(次韻)했다.
‘만권의 책을 읽은 서생이 면목 없네/ 두 해나 궁발(窮髮)에서 숫양(羊)을 먹이다니/ 인의(仁義)를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가훈(家訓)인데/ 아이들까지 개와 양에게 절하는 것 부끄럽네’
1600년. 마침내 수은은 일본 류우노의 성주 아카마쓰의 힘으로 괴로운 포로생활의 막을 내렸다. 정유재란 발발 4년 후, 4월에 다른 포로 30여명과 함께 풀려난 수은은 5월게 고국 땅을 딛었다. 고향에 돌아오자 곧바로 순천 교수직에 임명되었으나 많은 죄를 지운 몸이라고 극구 사양, 여생을 영광에서 밭갈이와 독서로 보내다 1618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16세기 말은 조선시대의 전후기 분수령으로 국가 자체의 모순된 정치를 드러내면서 왜란을 당한 어려운 때였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양이 강해지고 동양이 기우는 단계로 중국에서는 明·淸의 교체기, 일본은 강호시대가 개막되는 대전환기였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누구보다도 절실하고 특별한 체험을 한 인물이 강항이다. 조선사회의 지도급 지식인으로 전쟁 중 포로로 잡혀가 일본의 실체를 간파하고 4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해는 17세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당시 편협하고 고지식한 조선왕조의 집권층은 대변혁의 시련을 겪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국가의 정치·경제·군사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이에 회의를 품은 수은은 정계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정신적 갈등을 시와 산문으로 토해 내면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뒤 임금 앞에 나아가 일본생활의 실상과 행적을 아뢰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부끄러운 죄인으로 스스로 칭하고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았다. 지인과의 편지에서 그는 ‘더구나 나는 비록 이 세상에 있다 해도 맥이 풀려 저승의 사람과 같으니, 윤회가 있다면 속히 죽어 다른 삶을 얻기를 바랄 뿐 현세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고 썼다.
그는 1618년 부친상의 복을 벗은 지 한 해 지나 세상의 일을 마친 듯 세상과의 질긴 끈을 놓았다. 조선인이 일본유학의 비조가 되고, 풍속, 지리, 역사, 군사, 정세는 물론 그들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낱낱이 기록한 강항의 ‘간양록’은 일제시대 금서의 하나였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