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200여년 전 ‘자동양수기’ 발명한 호남 실학의 대가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
| 2013년 08월 30일(금)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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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조선을 ‘위기의 시대’로 본 선비가 있었다.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 살았던 규남 하백원. 무등산의 3대 절경인 규봉(圭峰)의 남쪽 마을에서 태어나 규남(圭南)이라 호를 정하고 이곳에서 저항과 혁신의 큰 목소리를 냈다.
그가 가장 답답해 한 것은 조정의 쇄국정책이었다. 18세기 세계 각국은 이미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하고 있는데, 조국은 형식적인 윤리와 공리공담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고집하고 있으니 속이 탔다. 임진왜란을 겪고나서 조선에도 외부 문물이 들어와 서서히 서구에 눈뜨기 시작했으나 아직 유교의 전통이 거센 시기였다.
규남은 무엇보다 생활의 혁신을 시급히 생각했다. 그는 한양을 자주 왕래하며 선진문물을 익히기에 힘썼다. 차 한 대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주택은 마치 벌이나 개미굴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또 상거래가 저대로 안돼 있는 상황에서 당쟁이나 일삼는 양반들에게 실망을 했다. 이런 판국에 실학사상마저 제대로 움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으니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과학을 해야겠다. 규남은 인물, 사상 연구부터 지리, 수차에 이르기까지 인문·자연과학을 망라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가 결정체로 내놓은 ‘자승차’, ‘자명종’에 관한 연구는 과학사에 획기적인 기록을 남겼고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리치의 세계 지도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손수 그린 장본인이다.
사실 규남 하백원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성리학으로 400여년의 긴 시간을 지나며 과학이 등한시됐던 것이 사실이다. 집권층은 예송논쟁 등 공리공론을 주고받으며 권력장악에 골몰하였고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지식인들과 땅에서 유리된 백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 시기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으며 명나라를 이어 중원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은 청나라마저 밀려오는 서구열강들 앞에 속수무책인 지경이었다.
몇몇 선각자들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여기저기서 실학을 꽃피워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천주학을 내세우며 전통유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한편에서는 유학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실학자들은 실사구시, 경세치용, 이용후생의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한문서학서’를 통해 서학이자 청대의 학술인 천주교, 천문, 역상, 수리, 측량 등의 신학문을 흡수하고 있었다.
나라가 온통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순조 34년, 전라감사 서유구는 ‘자승차도해(自升車圖解)’라는 책을 보고 화순(옛 동복현)에 묻혀 살던 그 책의 저자인 실학자 규남 하백원(1781-1844)을 찾았다. 자승차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양식 수차의 원리와 같은 신개념의 자동양수기였다. 전라감사는 자승차를 가뭄 극복에 이용해 보고자 제작을 독촉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던 설계도 만으로 급작스런 실전투입은 어려웠던 탓에 현장에서 이용될 기회는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일로 그는 ‘이재(理材)’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고 7년이 지난 61세에는 석성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벼슬은 생민(生民)의 이익을 보장하고 빈궁을 구휼하는 일”이라 믿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편에 서서 세금을 탕감해 주는 등 선정을 폈으나 토호, 향리들의 모함을 받아 1년여 귀양살이까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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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 ‘천문도’, ‘동국지도’, ‘만국지도’ 등도 제작했다. 그의 ‘동국지도’, ‘조선전도와 8도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51년 앞선 것이며 ‘만국지도’ 또한 중국에 온 선교사 알레니의 것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한국에는 현존하지 않는 희귀본으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자승차에 대해 국립중앙과학관은 “세종대에 발명한 자격루 이후 시도된 자동화 기기이며, 강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수차를 회전시키는 것은 수력발전의 원리와 상통한다. 겨레과학의 선구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지난해에는 실물 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발명가이자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학자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그의 선조들은 화순(동복)의 물염정을 중심으로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교류했으며 그 또한 시대에 대한 비판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뛰어난 창의력으로 이땅에 과학문명의 꽃을 피워낸 과학자요 성리학자이며 실학자였던 규남. 64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생애는 대략 3기로 나눌 수 있다. 수학기와 학문의 발전기, 말년의 자숙기. 제1기라 할 수 있는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20세 남짓 되기까지 규남은 충남에 있는 송환기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닦았다. 12세 때 이미 경서 공부를 마쳤고 중국 송나라 정호, 주희의 문집을 독파할 정도였으며 15세 땐 문사로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많은 영향을 미친 스승 송환기는 송시열의 5대손으로 조야에 덕망이 높았던 선비로 한참 무르익기 시작한 실학의 향기를 맡게 해주었다.
제2기는 진사시에 합격한 23세부터 53세까지 학문에 전념한 30여년으로 본격 실학 연구에 몸을 바친 시기다. 이 시기엔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이 나주에 유배와 있었으며 장흥의 존재 위백규가 죽었다. 두 실학자에게 직간접 영향을 받았을 터이다. 이 시기에 그가 발명해낸 과학적 기기는 한국 과학 발전을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제3기는 말년을 보낸 10년. 51세 때 처음으로 참봉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갔고 53세 때 금부도사로 전임되었으며 2년 뒤에 형조좌랑에 승진했다. 형조좌랑의 직책에 있을 때 그는 송사를 처리함에 공평해 장관이 판결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나 그에게 문의했으며 소를 올릴 때도 모두 좌랑이 검토해주기를 원했다. 61세, 석성현감에 부임한지 오래지않아 탐관오리의 횡포와 조세의 문란으로 피폐한 고을을 희생시켰으나 지방 토호들의 모함으로 보령현으로 귀양을 가게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독서를 즐겨하며 학문을 계속했는데, 학업을 청해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1843년 특사로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온 뒤 이듬해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집 7책 3권을 남기고.
‘놀고 먹는 귀족계급은 나라와 백성을 좀먹는다’는 극론을 편 홍대용의 실학사상에 감명을 받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을 가졌던 선비. 유학에서 벗어나 이용후생하려는 실학에 눈을 돌려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며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골똘이 생각한 선비. 때문에 가난에 찌들렸으면서도 많은 서적을 구입 온 방안을 온통 책으로 쌓아놓고 무려 1만권이나 되는 책을 읽어 조국이 살찔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낸 선비. 허례나 일삼고 당쟁 싸움이나 즐기는 세속의 벼슬아치들과는 달리 뜻이 맞지 않은 선비들과 친교를 하지 않았던 어른.
‘창조’가 시대의 화두가 된 요즘 독창적인 연구 업적은 국제화를 부르짖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에도 무등산 뒤쪽 화순 이서에서는 자명종 소리가 들린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 살던 실학자 규남이 사랑방에 걸어둔 자명종이다. 이 마을에 건립된 하백원기념관에는 서양식 자동양수기라 할 ‘자승차’(自升車)의 모형도 있다. 하백원이 남긴 설계도에 바탕한 것이다. 터빈의 회전력으로 피스톤을 돌리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중국의 수차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야사리 사람들은 요즘 실학 콘텐츠를 활용한 문화마을로 이 마을을 꾸미고 있다. 60여가구 가운데 17가구는 전남도의 ‘행복마을 프로젝트’ 지원으로 지난해 4월 한옥을 짓기 시작해 곧 마무리한다. 한옥 민박을 운영하고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할 계획이. 화순군도 옛 이서분교 터를 실학 문화체험 공간으로 리모델링할 방침이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