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문학기행]부패한 세상 ‘언어의 칼’로 정면 저항 김선기 박사의 남도문학기행 / <14> 국토의 시인 조태일 조해일·조태일·조세희 ‘경희대 趙트리오’ 형성 ‘시인’誌 창간해 김지하 · 양성우 · 김준태 배출 70년대 유신독재 맞선 민족문학단체 ‘自實’창립

2013년 10월 18일(금) 00:00

김용택 시인(왼쪽)과 함께 했던 생전의 모습(오른쪽).

‘소주에 밥을 말아 먹는 시인’으로 불릴 만큼 술을 즐겼던 조태일은 호탕한 성격만큼이나 남성적이고 힘 있는 시를 남겼다. 등단 이후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등 수많은 시집을 펴냈는데, 특히 ‘국토’는 민족주의와 민중의식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실어 1970년대 말-80년대 초 판매 금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죽형(竹兄) 조태일(趙泰一, 1941-1999)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 태안사의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절의 주지스님이었던 아버지는 서른다섯 살에 열일곱 처녀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았는데, 조태일은 그 중 넷째이다.

시인이 8세 때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모든 생활의 근거를 버리고 여덟 식구를 이끌고 광주로 이사, 조태일은 광천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광주서중을 거쳐 광주고교를 다닐 때 어린 조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는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국토 서시’ 육필원고.

고교 3학년 때인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다시 鋪道에서’로 당선작 없는 가작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중에 ‘아침 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의 화려한 문을 열어 제쳤다. 이때 ‘경희대 3趙’란 유명한 일화가 생겨났다. 그 주인공은 ‘매일 죽는 사람’의 조해일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쏘공)’의 조세희, 그리고 조태일이다.

그는 등단 시절부터 현실의식이 강한 시를 써 오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노래하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한 저항을 담았다. 특히 삶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제도적인 폭력에 맞서서 쓴 ‘식칼론’은 시대적 삶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세와 역사의식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여기서 ‘식칼’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남과 공유하는 무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태일은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을 등단시켰다. 그러나 ‘시인’지는 창간 1년여 만에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1974년에는 고은·백낙청·신경림·염무웅· 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과 함께 민족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9월 17일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체가 되었다.

충남 홍성군 결성면 민족시비공원에 세워진 ‘풀씨’ 시비.

부패한 세상에 정면으로 언어의 칼을 들이밀던 시인의 삶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1969-70년 ‘시인’지의 창간과 폐간에 이어 1975년 제3시집 ‘국토’의 판매금지, 1977년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 사건으로 투옥, 1979년 자택 옥상에서 유신독재 비판 연설로 투옥, 1981년 평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와 1983년 제4시집 ‘가거도’가 판매금지 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이처럼 시인이 걸어온 길에는 언제나 굴곡이 있었다. 그러나 시인의 천성은 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 속에 스며있는 생명들의 목소리에 눈물 흘리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시인을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어난 곳도 자연이고, 죽어 묻힐 곳도 자연이기를 원했던 조태일. 시인의 삶과 죽음이 고스란히 뭉쳐있는 곡성 태안사는 그래서 시인의 문학 행위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었다.

재현된 시인의 집필실(조태일 시문학관).

1999년 7월 간암 선고를 받은 조태일은 “암세포도 내 몸의 일부니 지나치게 미워하면 안 나간다. 잘 타일러서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지만, 시인은 다른 한편으로 “나 한 사람의 죽음은 / 수천 사람의 소생일 수도 있거늘 / 나 한 사람의 삶은 너무 넓게 차지해서 / 수천 사람이 비좁아할 수 있거늘” 그렇게 시를 쓰며 홀로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조태일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내일 퇴원할 것처럼 편안한 얼굴을 하고는 스스로 영정 사진과 수의를 준비했었다. 아무도 시인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1999년 9월 7일 시인은 아침 이슬이 내리듯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술이 아니면 견딜 수 없었던 ‘술 권하는 사회’가 시인을 너무 빨리 다른 세상으로 보낸 것이다.

손때 묻은 시인의 흔적들 (조태일시문학관 소장).

등단작 읽기

아침 선박(船舶)



1

아침 바다는 예지(叡智)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저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同伴)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깨는 출항.



세수를 일찍 끝낸 여인들은

탄생을 되풀이한 오랜 진통에

땀 배인 내의를 벗어 바다에 던지고

파이프에 남자들은 두고 온 연대(年代)를 열심히 피워 문다.

<경향신문, 1964. 1. 1>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조태일의 ‘아침선박’일부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보여준 순백한 젊음과 관능의 아름다움은 많은 평론가들의 지적대로 눈부시다.

그것은 당시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과용한 듯한 한자어의 무게와 언뜻언뜻 다소 모호해 보이는 관념들을 극복하게 만든다. 특히 이 작품을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조국의 자연에 대하여 자연스레 다시 눈뜨면서, 조국에 대한 큰 사랑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과 ‘식칼론’에 이어 장엄하게 펼쳐질 ‘국토’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조태일은 민중적 생명력에 대한 일관된 긍정과 자연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 단절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낙관적이고 근원 지향적인 시세계를 완성해간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시인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강렬한 남성적 음역(音域)과 생애는, 1960년대 이후 펼쳐진 현대사와 서정시의 미학이 얼마나 긴밀하게 일치할 수 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 뜻 깊은 사례이다.

그의 시세계는 생명에 대한 추구라는 일관성을 보여주었고, 민중적 삶을 직접적 소재로 삼던 데서 자연 사물로 시선을 돌리는 변모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시세계에 끊임없이 흐르는 시적 에너지는 저항성과 천진성이다.

결국 조태일의 시적 여정은 저항성과 천진성이 공존하고 갈등한 세계이다.


이 연재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시문학파기념관장 ·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