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소리로 청중 웃고 울린 조선후기 서편제 대표 명창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새타령·춘향가·심청가에 능해 서민 감성 자극 소리묘사도 뛰어나…광주소리로 명맥 이어져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2013년 10월 25일(금) 00:00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1구 얼그실마을에서 바라본 무등산 풍경.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인 이날치(李捺致·1820-1892)는 이 마을에 살던 류씨집안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이날치는 대명창 박유전(朴裕全)에게 서편제(西便制)를 계승했고 무등산 자락 증심사에 들어가 수년간 소리 수련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79>무등산의 재발견-사람을 품은 산 (42)이날치

조선 후기에 무등산 증심사 계곡을 쩌렁쩌렁 울린 명창이 있었다. 그는 증심사와 증심사계곡에서 목을 갈고 닦아 명창 반열에 올랐다. 무등산이 잉태한 위대한 예술가 중에 한 분인 명창 이날치(1820-1892) 선생은 조선후기 8명창 중에서도 서편제 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꾼이었다.

판소리는 18세기초 발생한 것으로 18 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의 완성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판소리의 기원은 훨씬 이전, 신라의 화랑과 관련되며 그 직접적 계보는 산대잡희의 한 과정이었던 극적 노래의 분화로 보고 있다.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19세기 전반기를 ‘전기 8명창시대’라 하고 19세기 후반기를 ‘후기 8명창시대’라고 한다. 권삼득·황해천·송홍록·방만춘·염계달·모홍갑·김계철·고소관·신만엽·공광록·주덕기 등의 8명창들은 각기 특색 있는 창법과 선율을 개발해 양반들의 감상과 미의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으며 각 지역의 민요 선율을 판소리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 후기 8명창들은 전기 8명창들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다듬어 다양한 더늠(長短)을 창출했다.

흔히 박유전에서 시작하여 이날치와 정창업에게 전승된 소리를 서편제의 범주에 두고, 정응민에게 전승된 소리는 ‘강산제’라는 유파의 구분을 둔다. 이 중 이날치에게 전승된 소리는 다른 유파의 소리가 섞이지 않은 것으로 광주와 인근의 지역(화순, 담양)에서 김채만-박동실-한애순으로 이어져왔다.

시인묵객 초동목수 할 것 없이 찬미했던 이날치! 그는 1820년 담양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후 판소리 입문과정은 소상히 알려진 바는 없고, 박황(판소리 이백년사)과 이규섭의 글(판소리 답사기행)에 소개된 이날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본명은 경숙(敬淑). 본명보다 날치라는 예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예명을 ‘날치’라고 부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몸이 날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성깔이 날카로웠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1구 얼그실마을에서 유씨집안의 머슴살이를 하던 이날치는 17-18세 되던 무렵 주인 류한기가 수북면 대방리 포백마을로 이주하자 그곳 집강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청년기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남사당패의 놀이를 보고 예인의 꿈을 키우다 결국 남사당패를 따라나서 줄타기의 명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날치는 소리꾼이 되기 위해 당시 최고의 동편제 소리꾼인 정읍 고부 출신 박만순의 수행고수가 된다. 박만순은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던만큼 자부심과 오만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날치는 박만순의 고수였지만, 실제 나이는 박만순보다 10여년 연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만순이 이날치에게 발 씻을 물을 떠오라고 하였다. 대야에 물을 떠온 이날치는 자신에 대한 경멸을 견디지 못하고 그 물을 박만순에게 끼얹고는 무등산 증심사에 들어가 각고 끝에 마침내 득음을 하게 되었다.

이후 박유전에게 소리를 배우고, 수련한 기간을 합해 대략 10여년으로 보면, 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를 한 시기는 1870년대 무렵이다. 이날치의 전성기는 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무과선달의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다.

이날치가 서울 장안에서 한창 인기를 누리던 때에 서울에 성격이 아주 굳세고 침착하기로 이름난 늙은 재상(대원군의 형인 이최응)이 있었는데 그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겉으로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어떤 일이 벌어져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루는 이재상의 친구가 “명창은 능히 사람을 울리고 웃긴다는데 이날치야말로 정말 청중을 자유자재로 웃기고 울립디다”하는 말을 꺼냈으나 이재상은 “그럴 리 없소.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졸장부이지 어찌 기백 있는 대장부가 한낱 비천한 광대의 소리에 울고 웃는단 말이오. 당치 않은 말이오”라며 대뜸 되받았다. 논쟁 끝에 직접 소리를 들어보기로 한 이들은 이날치를 불러오게 하였고 이재상은 “네 소리에 내가 감동해서 울게 되면 천 냥을 상으로 내릴 것이로되, 만약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았을 때에는 너의 목을 베리라”며 엄포를 놓았다. 이날치는 주저함 없이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부친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려 부친에게 작별을 고하는 대목’을 부르고 이어서 ‘남경장수 뱃사람들을 따라가 인당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는 대목’을 한없이 슬프고 처절하게 불렀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마치 심청이 살아 돌아와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감동 받았고 이재상도 돌아앉아 눈물을 닦았다. 이재상은 “명창은 과연 사람을 울리고 웃긴다 하더니 과연 빈말이 아니로다. 그대야 말로 대명창일세”라며 천냥금을 상으로 내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새타령과 춘향가·심청가에 능했고, 타고난 성량과 때에 따라 청중을 울리고 웃기며 시인묵객 초동목수 할 것 없이 찬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명창의 소리는 남도 땅에서 그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날치의 소리는 김채만(金采萬)을 거쳐 박동실과 박종원에게 이어졌는데, 김소희·김동준·한애순 등이 박동실에게 배웠으며, 한승호는 박종원으로부터 ‘적벽가’를 배웠다. 그의 ‘새타령’은 당시 독보적이었다고 하는데, 이동백이 이를 이어 녹음을 남겼다. 특히 ‘춘향가’·‘심청가’를 잘했으며, ‘조선창극사’에 그의 더늠으로 ‘춘향가’ 중 ‘망부사’(望夫詞)가 전한다. 이날치계의 소리는 박유전계의 다른 소리에 비해 무속과 무가의 특징을 보다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날치의 소리는, 화순 출신으로 광주 속골에서 살았던 김채만에 의해 담양 광주 화순 등지에 퍼져 이른바 광주소리가 됐다. 이 명창이 광주 문안에서 소리를 하면 문 밖 무등산에서도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수리성(거칠고 탁한 소리)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수리성이 얼마나 컸던지 ‘춘향가’ 중에서 ‘신관사또 부임대목’을 할 때 나팔소리를 흉내 내면 실제 나팔 소리와 구별이 안 될 정도였고 “인경 소리가 뎅뎅”하고 소리를 하면 정말 인경 소리처럼 들렸다고 할 정도로 성대 묘사에 뛰어났다고 한다.

담양군 수북면 성암야영장 입구에 세워진 이날치의 기념비.

이 광주소리는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6·25때 박동실 공기남 등 중심 인물들이 월북한 뒤 그 세력이 급격히 약해져 버렸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기교와 정교한 창법을 대표하는 이날치계의 소리는, 현존 판소리에 끼친 심대한 영향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날치는 수리성의 큰 성량과 슬프고 한 서린 목소리를 장기로 하여, 나중에는 박만순 김세종 등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조선창극사’에는 박만순과 이날치를 비교하여 ‘박만순의 소리는 식자에 한하여 칭예를 받지만, 이날치의 소리는 남녀노소 시인묵객 초동목수(나무꾼) 할 것 없이 찬미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라고 써있다. 이는 이날치의 서편소리가 보다 서민적·민중적 감성에 접근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살이부터 시작한 이날치의 성장 배경이 그의 예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금도 광주소리는 가장 서민적 감성에 가까운 소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치는 1820년에 태어나 1892년 장성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성에서 그 흔적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현재 이날치 기념비는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병풍산 아래 청소년야영장 입구에 서 있는데, 이 부근에는 이날치가 판소리 창자로 대성하기 이전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는 집이 있는 등 이날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한 때 이날치가 살았던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에 우뚝 서 있는 ‘국창 이날치 기념비’는 높은 단 위에 북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소리는 흔적도 없고, 한 때 온갖 모멸을 감수하면서 메고 다녔을 소리북의 형상이, 종살이로부터 시작하여 줄광대, 고수를 거쳐 마침내 대명창이 된 이날치의 예술가로서의 험난했던 구도의 길을 어렴풋이 얘기해주고 있다.

무등산 아무말없이 천재 명창을 낳고 또 그 명창을 거두어갔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