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년 전 물염정 가는 길 ‘생생’ 선인 숨결 오롯이 살아있는 역사 광주매일신문 집중제안 한국학호남진흥원 설립하자 <13>스토리텔링의 가능성 네명의 선비 물염적벽서 잠시 취흥 돋워 호남사림 학맥 형성 중요한 계기로 작용 많은 인적 길 위의 이야기 조명작업 절실

2014년 02월 10일(월) 00:00

수많은 인적을 남긴 길 위의 역사와 이야기를 되살려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우리의 미래를 모색할 수 있다. 70여 평생을 걸어온 문순태 소설가는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역사의 발자국이 찍히게 된 길을 동행하며 감회에 젖는다. 사진은 임억령, 유성춘, 김인후, 양산보 등 네명의 선비가 소쇄원을 떠나 화순 동복으로 유배 온 최산두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렀던 물염적벽.

길은 선인들의 숨결이 오롯이 살아있는 역사이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누가, 언제, 무슨 일로 걸었을까, 상상해보면 머릿속에 여러 색깔의 무채색 그림이 그려진다. 그래서 길은 값진 문화유산이며 인문학의 길라잡이가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생오지 앞길을 스토리텔링을 해보자.

소쇄원에서 담양 남면 면사무소 앞을 지나, 유둔재를 넘어 인암마을과 구산(옛 구원역)을 뒤로하고 화순 이서면 물염정(勿染亭)에 이르기까지, 지방도 887번 10킬로 정도 되는 이 길에 어떤 역사적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

인적이 드문 호젓한 산자락 오솔길에 불과했던 이 길은 1519년 기묘사화로 역사의 발자국이 찍히게 된다. 조광조가 능주로 귀양 와서 사약을 받자 제자인 양산보는 고향인 지석리로 돌아와 은둔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520년 신재(新齊) 최산두 (崔山斗)가 동복으로 유배를 당한다. 최산두는 광양 출신으로 1513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수찬, 이조정랑. 장령. 사인 벼슬에 올랐고 유성춘(柳成春), 윤구(尹衢 윤선도의 증조부)와 함께 호남3걸에 든 인물이다.

물염정

그가 동복으로 유배를 오자, 송순 (宋純), 김인후(金麟厚), 유성춘(柳希春. 미암 유희춘의 형), 임억령(林億齡), 김윤제(金允弟)등 이 지역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동복으로 모여들었다. 이는 호남사림의 학맥을 형성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최산두가 13년 동안 동복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김인후와 유희춘 등 많은 호남 선비들은 최산두의 배소로 찾아가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

1527년 봄, 네 명의 선비들이 소쇄원을 떠나 동복으로 최산두 선생을 만나러가는 길에 물염적벽에 들러 국화주를 마시며 잠시 취흥을 돋우는 장면을 보자.

<소쇄원 양산보 집에서 이른 조반을 먹은 그들은 길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기진(奇進·기고봉의 아버지)은 장성 집으로 혼자 떠났고 임억령 유성춘 김인후 등 세 사람은 동복에 귀양와 있는 신재 최산두를 만나러 유둔재를 넘기 위해 연천리 독수정(獨守亭) 쪽으로 향했다. 김인후는 신재 선생님이 술을 좋아한다면서 양산보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일꾼 또바우에게 술 한 동이를 동복까지 지고 가게 하였다. 양산보는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유둔재 너머까지 따라갔다. 양산보는 유둔재를 넘어 적벽산과 백아산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구원(龜院)까지 함께 갔다. 구원 왼쪽으로 솟은 연화봉을 뒤로하고 백아산 쪽으로 십리쯤 더 가면 물염적벽이 있다. 최산두가 속세에 오염되지 않은 이곳의 경치를 보고 감탄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물염적벽을 마주하고 둘러앉아서 양산보가 준비해 온 음식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최산두가 이곳에 와서 지은 시를 소리내어 읊어댔다. “백로가 고기 엿보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 노란 꾀꼬리 나비 쫓는 모습 산이 황금을 토하는 듯하네” > (졸저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에서).

이 때 최산두의 나이는 44세였고 양산보는 25세, 임억령 31세, 유성춘 28세, 김인후는 18세였다. 물염적벽에서 임억령, 유성춘, 김인후는 동복으로 향했고 양산보는 이들과 헤어져 소쇄원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87년의 세월이 흐른 2014년 2월4일 오후 , 나는 옛 선비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물염정까지 갔다. 오솔길은 신작로가 되었고 고갯길 대신 터널이 뚫렸지만 길은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앞에 세워진 병풍 모양의 김삿갓 시비

이 길을 걸으면서 문득,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이들과 같이 최산두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랬더라면 나도 지금쯤 그 선비들 반열에 내 이름이 오르내릴 수 있을까. 생오지에서 물염정까지는 걸어서 50분이 걸렸다. 나는 물염정 언덕에 올라 붉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있고 깎아지른 듯한 적벽을 바라보았다. 백아산(해발 804m)에서 발원한 동복천이 옹성산 자락을 감고 굽이치며 만들어낸 물염소의 물빛이 하늘을 닮은 청색 빛으로 무척 깊어 보였다.

물염적벽은 노루목적벽, 보산리적벽, 창랑리적벽과 함께 저 유명한 화순적벽군에 속했다. 안타깝게도 1985년 동복댐이 만들어지면서 세 적벽은 높이 40여m의 적벽 중 25m가 물에 잠겨 본디 모습을 잃었고 물염적벽만 그대로이다.

이곳에는 중종 때 구례군수와 풍기군수를 지낸 송정순(宋庭筍)이 1566년에 건립한 물염정이 있다.

김인후 등이 최산두를 만나기 위해 동복을 왕래하며 쉬어갈 무렵에는 아직 이곳에 정자가 없었다. 정자에는 김인후, 이식·권필, 김창흡 등이 이곳의 아름다운 절경을 노래한 시액(詩額) 23점이 걸려 있어 옛 선비들의 시심을 엿볼 수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물염정이 세워진 후에 이곳에 왔다. 그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1778년 화순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화순 만연사 소속암자 동림사(東林寺)에서 글을 읽었다. 그 때 다산은 물염정에 와서 ‘유적벽정자’ 라는 시를 썼다.

<해맑은 가을 모래 오솔길이 뻗었는데/ 동문의 푸른 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 새벽녘 시냇물엔 연지빛 잠기었고/ 깨끗한 돌벼랑은 비단무늬 흔들린다/ 수령의 한가한 놀이 누가 흥취를 즐기나/ 시골사람 무리지어 밭 갈고 낚시 하네/ 사랑스럽다 고운 산수 외진 곳에 자리잡아/ 명성 흘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오> 그 때 다산의 나이 17세였다.

물염정 앞에는 병풍 모양의 김삿갓 시비가 세워져 있다. 조악하기가 말 할 수 없으나 이 시비를 통해 방랑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김병연(金炳淵)은 만년에 이곳에서 가까운 동복면 구암리 창원정씨 댁 사랑채에 머무는 동안 자주 물염정에 들렀다고 한다. 김삿갓은 물염정에서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 있고/ 적병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를 흐르는구나”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오랫동안 물염정 마루에 무연히 걸터앉아 있자니 입춘한파의 차가운 바람에 코가 맵고 귀가 시려웠다. 언덕을 내려와 그 길을 되돌아 내 탯자리인 구산 앞을 지나면서, 문득 내가 70여 평생을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내 생의 길모퉁이마다 회한의 깊은 한숨이 쌓여 있는 것을 느끼고 자괴감으로 무릎 꿇고 싶었다.

모든 길에는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 길에 많은 인적을 남겼다. 선한 사람도 지나고 악한 사람도 지나갔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간의 먼지 속에 켜켜이 숨겨져 있다. 길 위의 역사와 길 위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것은 옛 사람들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의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인문학의 과제이며 호남학의 미래이기도 하다.

문순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