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정치가 마음을 얻는다’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2014년 09월 10일(수) 19:20

지난해 겨울, 핀란드의 한 쇼핑센터에서 일회용 비닐 쇼핑백 대신 보자기 쇼핑백을 들고 있는 한 여성이 화제가 되었다. 그 여성은 정육점으로 가서 고기를 구입한다. 대낮에 나 홀로 쇼핑 나온 평범한 유럽 중년 여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화제일까? 바로 타르야 카리나 할로넨(Tarja Kaarina Halonen)이었다. 우리나라 누리꾼들은 전직 대통령이 경호원 하나 없이 쇼핑백을 들고 가게에 들어가는 평범한 모습 하나에 큰 감동을 했다. 할로넨은 2000년 취임 직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평범한 행동’이 화제가 됐다. 집에서 쓰던 다리미를 가져와 직접 옷을 다렸고, 호텔 미용사를 보냈더니 ‘머리 손질은 내가 한다’며 거절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5일전에 도하 언론에서 ‘추석민심 듣겠다’는 정치인에게 주문한 말은 한결같았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과 총리, 장관 등 정부 고위관계자들과 여·야 정치인들이 추석연휴 반가운 친지들과의 해후자리에서 ‘잘 듣는 귀’를 가져달라는 것. 민심과 여론의 실체에 마음 열어달라는 것.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입 대신 귀를 열어달라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진, 같은 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편에 속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얘기를 가슴을 열고 들어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휴 지나고 나서 정치인들이 추석민심, 바닥민심 전하는 태도를 보면 그리 엄중하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추석을 쇠고 나서 할로넨 같은 소박한 정치인이 떠오른 것은, 추석 연휴, 정치인들이 민심 듣겠다며 보좌관과 지방의원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모습이 언짢아서다. 같은 편 정치인에게 둘러싸인 서민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소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켜켜이 쌓인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한 체 정치력을 상실한 대한민국 정치인들에게 할로넨의 정치철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핀란드는 우리나라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삼림 외에는 자원이 많지 않은 인구 500만의 작은 나라다. 러시아와 스웨덴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은 역사를 갖고 있다. 핀란드는 할로넨의 재임 시절 국가청렴도, 국가경쟁력, 교육경쟁력 1위 국가로 변모했다. 경제적으로도 1인당 국민소득 3만6000달러의 강소국을 일궜다. 세계에서 전·현직 여성 대통령과 총리는 100명이 넘게 나왔지만 할로넨은 유일하게 재선에 성공한 인물이다. 그만큼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았다. 2000년 50%를 조금 웃도는 지지율로 당선됐지만 퇴임할 때 지지도는 80%에 달했다.

그녀의 성공 비결은 ‘소통’이었다. 세계 최고의 리더들을 현지 인터뷰해 책으로 엮은 ‘행복의 리더십’에서는 타르야 할로넨의 리더십을 ‘사우나 리더십’으로 표현했다. 주말이면 사우나를 즐기는 그녀가 일반 시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풍경을 빗댄 것이다.

2000년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할로넨은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실제로 할로넨은 정파에 휩쓸리지 않는 국정운영으로 임기 중 88%에 달하는 국민 지지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누군가 경이로운 지지율 88%(2003년) 비결을 물었다. “하하! 글쎄, 나도 정확한 비결은 모르겠다. 다만, 정치에서 ‘진실함(genuineness)’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정직함과 투명함은 최고의 덕목이다. 선거 전이나 후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할로넨 핀란드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핀란드 경영인협회 대표단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규제 완화를 위한 법 개정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재계 대표들이 대통령 집무실을 찾았을 때다. 그는 재계의 요구를 ‘특수한 이익단체에 관련한 문제’로 규정하고 “저의 판단 기준은 (사업가 단체가 아니라) 전체 국민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할로넨이 말하는 좋은 리더의 조건은 이렇다. “모든 지도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용기가 있어야 하고 또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리더는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핀란드 국민은 할로넨의 따뜻한 품성을 사랑했다. 오직 국민을 중심에 두고 국민 편에서 일하는 그의 민주주의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무엇보다 국가가 국민들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열광한 것이다. 무엇보다 생명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돈을 제1의 가치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평화와 사랑을 제1의 가치로 여기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도 ‘대단한 정치인 위대한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투명한 사람, 한쪽 편만 들지 않는 국민 모두의 편에 서서 국민과 눈을 맞추는 지도자를 원한다. 선거때는 무엇이든 다 해주고 무슨 불만사항도 다 시정할 것처럼 하다가 선거가 끝나자마자 입을 싹 닦아버리는 대한민국 정치인과 비교되지 않는가?

천 명이든 만 명이든 소위 말하는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해도 단 한두 명만이라도 제대로 된 정치인이 우리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을 설득해 내편을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얘기를 듣고, 국민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정치인…. /주필·이사 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