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엔 망명이나 갈까~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2014년 10월 08일(수) 20:12

한글날이다. 가을이다. 누군가에게 ‘손 편지’써서 애틋한 마음 전하고 싶은 가을이다. 가을하늘 보다가 우표 붙여 ‘손 글씨 편지’를 써볼까 편지지를 펴다가 핸드폰 카카오톡을 연다. ‘마음’ 전하는데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하냐싶어 핸드폰 자판의 자음·모음을 차례로 눌러 짧은 편지 보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상대가 편지를 확인하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답 글이 왔다. 너무 빠르다. 마음 왔다 갔다 하는 시간 치고는 너무 짧다. 어쩔 땐 ‘깊은 생각, 깊은 마음, 긴 시간’이 필요한 내용도 있을 터인데, 요즘의 ‘통신 편지’는 속전속결이다.

이제 문자 톡을 이용한 소통은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그런데 깊이가 있건 없건 이런 사적인 편지를 누군가 쉽게 엿본다고 생각하면 좀 끔찍하다. 둘 만의 중요한 비밀이나 정보를 누군가 은밀하게 들여다보고 그 사람의 행동반경이나 앞으로의 계획까지 미리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 들키는 소통 방식을 망설이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 ‘사이버 망명’이 화제다. 사이버 망명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적 사유 등으로 모국 법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해외로 인터넷 서비스의 주 사용무대를 옮기는 것을 말 한다. 필자도 오래 쓴 카카오톡과 이별하고 사이버 망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벌써 100만명이 넘게 카카오톡 이용자들이 러시아 개발자가 만든 메신저 ‘텔레그램’으로 대거 이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텔레그램은 요 며칠 애플 앱스토어 무료 앱 다운로드 순위 1위에 등극하며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을 밀어냈다.

왜 이렇게들 쉽게 사이버 망명처를 찾을까. 최근 검찰이 ‘인터넷을 실시간 모니터링해 허위사실 유포자를 상시 적발하겠다’며 전담팀을 꾸리면서 부터다. 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고 말한 이후 서둘러 내놓은 조치였는데 ‘카톡도 감시당할 수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검열이 불가능한 외국 메신저로 갈아타자는 주장이 일면서 ‘텔레그램’이 주목을 받은 것이다.

사실 이런 사이버 망명은 여러차례 있었다. 인터넷 실명제가 2004년 도입됐을 때도 네이버, 다음 이용자들이 대거 구글로 피난을 갔다. 2009년에는 ‘G메일’ 가입 열풍이 불었다. 당시 검찰이 MBC PD수첩 제작진을 수사하면서 이 프로그램 작가의 e메일을 공개한 것이 발단이 됐다. 수사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국가기관이 나의 e메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이유로 해외에 서버를 둔 G메일로 네티즌들이 대거 이탈한 것이다.

관심을 모으고 있는 텔레그램은 푸틴에 저항해 러시아를 떠난 파벨 두로프라는 개발자가 러시아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보안을 강화해 만든 메신저다. 텔레그램의 개발자는 러시아판 페이스북인 브콘탁테에 올라온 내용을 러시아 정부가 검열하고 개입하려고 하자, 떨쳐 일어나 텔레그램을 만들어 독일에서 운영하고 있다. 텔레그램의 첫 페이지에는 ‘우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를 되찾자’고 적혀 있다. 외신들은 ‘텔레그램이 한국정부로부터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았다’는 제목으로 카카오톡 사찰 논란에 따른 사이버 망명을 소개할 정도다. 미국 IT전문매체 더 버지(The Verge)는 “사적인 통신에 대한 수사기관의 감시강화가 한국 사람들의 암호화된 메시징 앱으로의 망명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며 “수백만 명의 사용자가 한국의 최대 채팅 프로그램인 카카오톡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의 텔레그램 초기 사용자는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 같은 증권가 사람들 이었다. 금융위원회가 멀쩡한 기업까지 ‘불량 감자’로 지목해 찍어내는 풍문의 온상지를 들춰내겠다며 증권가 사람들의 메신저를 뒤지자, 자구책으로 메신저를 텔레그램으로 바꿨다.

우리나라 IT기술은 세계 정상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IT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이버상의 개인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으면서 시작된 망명 행렬로 인한 국가적인 손해는 어쩔 것인가. 이미 공무원, 국회의원, 기업 임원 등 지도층 인사들까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버망명을 감행하고 있으니, 자유를 선택한 손해를 톡톡히 감수해야 할 것 같다.

더 심각한 것은 망명하여 주고 받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외국 허공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허망함이다. 이 시대 대한민국의 삶을 외국에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인터넷은 이제 한 국가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수많은 나라의 대소사가 인터넷에 남고 내 가족의 기록과 친구와 주고받은 일상 기록들이 고스란히 축적된 인터넷 공간, 인터넷 집이 국제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이미 기술적 장치가 아닌 한 나라 및 개인의 역사, 삶, 사랑이 담긴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기술을 넘어 철학과 문화, 그리고 종국에는 역사가 된다. 인터넷에 산재한 빅데이터를 돌리기만 하면 한 국가 현대사 뿐 아니라 국민의 세세한 일상까지 드러나는, 그런 소중한 추억이 외국의 서버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이 시대의 ‘사이버 망명’이 단순히 인터넷 장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록과 역사’가 옮겨가는 정신적인 망명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영혼’이 흔들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경제적 군사적 식민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디지털 식민지인지도 모른다.

정부와 수사당국은 더 이상 사이버 망명을 부추겨선 안 된다. 사이버공간이든, 실생활이든 개인의 사적인 대화를 검열하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아픈 국민 마음을 알아야 한다.

필자도 이 가을에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의 사이버 망명을 고민하고 있다. 애국심 발휘하자니 카카오톡에 남아 대화내용을 제한해야 할 것 같고,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자면 텔레그램으로의 망명을 시도해야 할 것 같아,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올 가을엔 속 편하게 ‘손 편지’를 써야겠다. /주필·이사 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