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켜’와 ‘부름켜’ 김형만 |
| 2014년 11월 20일(목) 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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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비우는 계절이다. 구르는 낙엽소리 들으며 땀에 젖은 옷을 벗듯이 겸허하게 삶을 생각해보는 계절이다. 음악에 귀 기울이며 책을 읽고,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지붕 넘어 감나무가 홍시 두어 개 매달고 푸른 하늘에 걸려 있다. 이럴 때면 털실을 짜시던 어머니 얼굴이 보고 싶다.
나무들은 주름 깊고 두터운 몸뚱이를 트고나와 잎과 가지를 내어 봄, 여름을 푸르게 자란다. 때로는 큰비와 바람을 맞으며 햇볕을 쓸어 담아 살찌우고 열매를 만든다. 낮 시간이 짧아지고 밤기운이 차가우면 가지와 잎 꼭지 사이가 굳어지고 수분과 양분을 보존하기 위하여 떨켜를 만든다. 이 원리는 생존을 위한 비움과 버림의 심오한 나무들이 가진 본능이다.
사람이 늙으면 시력, 청력, 기억력이 떨어진다. 이때가 바로 자기를 비우는 시기이다. 소유하고 누리던 것을 지혜롭게 내려놓고 마지막을 준비해야한다. 사람은 나무들에게서 배운다. 나무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제가 서있는 곳이 삶의 자리이다. 크고 작은 것들을 곁에 두고 친구가 되며 들풀과 이끼에게 까지도 자리를 내어준다. 언 땅에서 견디어 낸 나무는 봄이 되면 부름켜를 발달시킨다. 체관부와 물관부 사이에 분열력이 강한 시원 세포가 발달하여 형성층을 만든다. 한여름 이렇게 만들어진 형성층이 곧 나이테가 되어 자기를 키워간다.
사람은 나무에게서 떨켜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부름켜를 통한 강력한 자기 성장의 시절이 있었다면 떨켜의 때에 버려야 할 것을 알며 비우고 내려놓는 진리를 배워야한다. 쟁취하고 누리고 이루었던 것들은 모두 손을 놓아야 할 것들이다. 내려놓을 때를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생명체는 이어져가고 삶의 질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질병, 이별, 가난과 슬픔 같은 어두운 밤을 맞기도 한다. 밤이 오지 않으면 별이 뜨는 것을 볼 수 없다.
나는 해마다 몇 그루의 국화를 가꾼다. 때를 알아 좋고, 생명의 질서와 아름다운 꽃을 나누어 가지는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찬바람 이는 석양에 국화분에 분주하게 날개 짓하는 나비를 보았다. 주황색이 짙은 날개에 녹두알같이 검은 점이 박힌 나비는 겨울 채비에 분주하였다. 며칠 후면 풀숲에 알을 낳고 날개를 접어 삶을 마감해야한다. 마지막 때를 알고 분주하게 꿀을 모아 건강한 산란을 준비한 것이다. 알에서 깨어난 어린 벌레가 고치를 짓고 번데기로 살아가는 겨울 채비를 위한 것이다. 이 날개 짓은 마지막을 위한 준비이며 경건한 삶의 질서를 끝까지 지키려는 미물의 본능인 것이다.
나무는 자연의 사물 중 가장 풍부하며 광범위한 상징을 가진 주제의 하나이다.
나무들은 지축에 뿌리를 내리고 창공에 줄기를 뻗는다. 인생의 번영과 누림의 상징이기도하다. 부유한 나라의 숲은 울창하고 아름답다. 북한 땅의 민둥산을 TV에서 본적이 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재앙은 사막화(沙漠化)이다. 기후변화나 인간 활동으로 인해 토지가 황폐해지면서 생산성을 잃게 된다. 숲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 지표면의 태양에너지 반사율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지표면이 냉각되면서 온도가 낮아진다고 한다. 차가워진 지표면에는 건조하게 내려오는 기류가 형성되고 강우량이 감소하여 사막화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이로써 지구는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야생동물은 멸종 위기에 이르고, 물 부족 현상으로 작물 재배가 어려워져서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된다. 우리 곁에 나무는 축복이며 인류와 함께 영원히 가야 할 존재이다.
인생은 하늘로부터 봄볕 따스한 들녘에 소풍가는 길을 선물로 받았다. 때로는 멀고 고달프기도 하지만 혹은 길을 찾아 헤매기도 하며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손 내밀어 일으켜주는 동무가 있고 등 도닥여주는 가족과 이웃이 있다. 이 좋은 계절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덜어내는 낙엽을 보며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 소소한 옷 하나 지어입고 싶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좋은 벗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조금 더 겸손하게, 친절을 베풀면서 아름다운 소풍 길을 즐기며 걷고 싶다.
천상병 시인의 시가 마음에 내려와 앉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가을은 생을 채워가며 지나온 발걸음을 뒤돌아보는 계절이다. 낙엽이 붉은 것은 함께했던 아름다운 것들을 지워내는 설움의 빛깔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마지막 남은 잎새까지 뿌리를 덮어주고 거름이 되어 준다. 떨켜의 때를 알고 옷을 벗는 거룩한 질서에 머리를 숙인다. 부름켜와 떨켜의 때를 분별하며 내려놓음을 가르쳐주는 이 가을의 단풍이 있어 하늘이 더욱 맑고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