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일 무등산은 말이 없었다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2015년 01월 07일(수) 20:12

1월 1일 무등산을 놓고 정치인들이 ‘산권(山權)’ 경쟁 했다는 얘기를 듣고, 참 많이 웃었다.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박지원·문재인 의원이 새해 첫 공식 일정으로 무등산 산행을 잡았는데, 등반 시간이 문 의원은 8시, 박 의원은 8시 30분으로 불과 30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자, 신경전을 벌이다가 한 사람이 오후 1시로 무등산 등반 시간을 조정했다는 것이다. 반면, 무등산 일부를 지역구로 하고 있는 박주선 의원은 당 대표 출마 선언을 하고도 무등산을 팔아먹지 않았다. 무등산은 ‘광주정신처럼 늘 가슴에 담아놓아야 하는 것이지 깜짝 이벤트로 활용할 산이 아니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1번지 광주를 품고 있는 영산(靈山) 무등산은 큰 뜻을 품은 정치인들이 1월 1일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나 무등산 정상에 올라 서석대·입석대를 바라보며 그들이 염원하는 것은 무등산이 역사 속에서 늘 꿈꿔온 세상과 다른 것 같다. 이번에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가 되겠다며 감히 무등산 정상을 밟고 도전 의미를 밝힌 두 사람의 출사 변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올해가 민주당 창당 60년이 되는 해이지만 ‘무등정신’으로 민주화·정치발전을 이끌어온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기개와 대범함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이 1월1일 무등산에 올라 80년 5월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시민군이 마지막 밤 죽음 직전에 나눈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그들은 자신이 힘겹게 무등산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정상에 서서 사진기자 앞에 포즈 취하기 전에 5·18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이고 뛰는 아주머니의 뜨거운 눈물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광주사람의 삶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무등산을 내려오면서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 지역 간의 차별, 계층 간의 갈등, 노사 갈등, 정치적 갈등, 동서의 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았다면, 이 시대를 향해 무등산이 내뿜는 정치적 화두를 듣지 못한 것이다.

무등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광주 역시 다급하면 찾는 정치 구걸 장소가 아니다. 남도의 학향·의향·예향의 물줄기를 대주고 있는 무등산의 의(義)로움이 가리키는 ‘정치 나침반’은 실로 엄중하다. 그 의미를 모르면 감히 올라서는 안 되는 산이다.

정치인이 떼를 지어 무등산을 올랐던 역사는 1574년 광주목사(지금 광주시장) 임훈이 당대의 내놓을만한 지역 정치·문화인 20여명을 꾸려 5일간 무등산을 답사한 기록이 있다. 당시 동행했던 제봉 고경명은 ‘유서석록’이라는 답사기에 당시 행적을 적어놓았는데 무등산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했다. 이 ‘유서석록’을 읽은 다산 정약용은 200년 뒤인 1778년 아버지가 화순 현감으로 재직할 때 무등산을 탐사하고 ‘유서석산기’를 남기면서 ‘마치 거인(巨人)과 위사(偉士) 같다. 말하지도 웃지도 않으면서 사물에 널리 미친다’는 표현으로 무등산의 위용을 알아차렸다.

조선시대 정치인들은 무등산에 올라 21세기 최고 화두인 평화·평등·자유의 가치를 이미 내다보았다. 그래서 무등산은 하늘을 향하는 산이 아니라 땅을 거두는 산, 자신을 하늘에 높이 솟구쳐 올리는 산이 아니라 기쁨도 아픔도 모두 안으로 간직하는 산, 스스로 대지가 됨으로써 아픈 역사를 그윽이 안고 있는 산,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을 타고 걸어오다 잠시 멈추어 너른 광주 벌판을 만들어놓고 조용히 남해를 바라보는 산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시대 왕정시대의 정치인도 무등산을 이렇게 겸허한 마음으로 올랐는데, 오늘 무등산에 오르는 정치인은 무등산에 대고 ‘나를 최고로 만들어 달라’며 빌고 있으니 ‘무등의 신’을 한참 잘못 알고 있다.

아는가. 평등·평화의 정신을 품고 있는 무등산은 무등에 오른 정치인에게 늘 그 가치 실현을 위해 희생해줄 것을 주문했다. 광주와 무등산이 정치인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익히는 것은 ‘희생’ 때문이다. 광주와 무등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피 흘리는 희생으로 구원을 자처했다.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뺏기게 생기자 임진왜란의 의병운동과 한말의 의병운동을 주도해 나라를 구했다. 일본의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전국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운동이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운동이었다면, 그 불씨를 꺼지지 않게 다시 지핀 것은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퍼졌으며 해외의 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되었던 광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리고 1980년 5·18일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사건이었다. 몇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낸 역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보통의 시민이 함께 만들어낸 역사다.

이미 5월의 대동세상(大同世上)을 경험하고 무등사상(無等思想)을 아는 광주사람들은 무등의 메시지를 안다. 무등은 대의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는 정치인에게 기(氣)를 넣어줄 산은 아니다. 필자는 무등산을 이용해 보여주기식 ‘정치쇼’를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무등산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무등산이 품고 있는 광주는 또 당신에게 어떤 의미길래 새해 첫날을 이곳에서 보내는 것입니까. 광주는 한때 핏자국과 총구멍들이 방치된 학살의 현장이었습니다.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은 가슴을 치고 있는데, 무등산은 아직도 그 아픔을 어루만지느라 겸허히 누워있는데, 이렇게 아픈 산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까”

/주필·이사 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