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고속철 지키기’에 명운 걸라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2015년 01월 21일(수) 19:50

이런 걸 두고 일장춘몽이라 하나? 일주일 전에 광주-서울을 기차타고 90분 만에 갈 수 있다는 소식 듣고 많이 설레었다. 아침 일찍 김치찌게 끓여 호남고속철 타면 서울서 자취하는 자식 아침 먹일 수 있겠다 싶어 참 좋아했다.

그런데 광주·전남·전북 호남권 550만 시·도민 열망을 하루아침에 뭉개버린 정부의 발표는 서대전역을 경유하겠다는 것이다. 서대전역을 경유하면 서울-광주 1시간 33분 고속철이 2시간 18분으로 늘어난다. 기존 2시간 50분에서 겨우 43분 단축하겠다고 9조원이란 돈을 쏟아 부은 꼴이다.

이미 호남보다 빨리 서울-대전 간 고속철을 갖고 있는 대전의 욕심으로 호남고속철을 호남저속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호남 무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04년 서울-부산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이후 10년간 부산은 고속철로를 타고 관광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 사이 확 변한 해운대를 보라. 스피드혁명과 주 5일제로 국민의 생활패턴이 웰빙 성향으로 변하는 큰바람을 경부고속철도가 일찍 개통된 부산이 제대로 누린 10년 동안 느린 철도를 바라보던 호남인은 제발 빨리 개통해달라고 통사정했다. 연기에 연기를 거듭한 결과 2015년 부산보다 10년 후에 호남고속철을 개통하면서 호남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게 아니라 ‘고속철’이란 말을 붙이기도 부끄러운 조건을 단 것은 호남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이다.

지금 호남은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일이 터진 시점에 텃밭 호남에 온 새정치민주연합 당권주자(문재인 박지원 이인영)들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이 문제로 호남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해하며 얼마나 분해 하고 있는 지 알면서도 ‘표’만 호소했다. 후보 모두 ‘호남 홀대론’을 내세우며 호남 살리기를 언급했지만 진정 호남 살리기의 기초가 되는 호남고속철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다. 급할 때면 호남에 우르르 몰려와 호남 ‘위하는 척’ 해놓고 급한 불이 꺼지면 전국정당 한다며 호남을 버린 이들의 눈에 호남고속철 문제의 심각성이 보일 리 없다.

그동안 이명박·박근혜정부가 호남을 노골적으로 차별했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무기력하고 무관심했다. 호남고속철은 이런 차별 속에 여러 차례 예산 확보가 안되고 공사가 지연됐었다. 그럴 때, 영남 사람인 문재인 의원 등 새정치민주연합내 영남 출신 의원들이 호남고속철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는 기사 역시 본 적 없다.

필자는 진보진영에서 호남차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적을 하고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정치인을 보지 못했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그 이유가 진보진영까지도 영남이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좌표가 생겼다.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후보 중 누가 진심으로 호남을 위하는가 가릴 만한 꺼리가 생겼다. 문재인 박지원 이인영 후보 중 호남고속철 서대전역 정차를 막는 이가 진정 호남을 위하는 정치인이다. 만약 경부고속철을 개통하기 2달 전에 기존에 없던 역을 추가해 30분 늦다는 발표를 했다면 부산·경남 국회의원 뿐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내 영남 국회의원들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대표 출마자 뿐 아니라 당론으로 호남고속철 원안 운행을 채택해 관철시켜야 한다. 서대전역 경유는 현실성이나 명분이 떨어지며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따라서 고속철을 저속철로 바꾼 정부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이 제 목소리를 못 낸다면 ‘호남에 뿌리를 둔 정당’이라느니 ‘호남의 적자’라느니 하는 말 다 거짓말이다.

그렇잖아도 호남고속철은 편도기준 하루 42회 운행으로 경부선 KTX 하루 108회의 절반에 못 미친다. 호남선 KTX 이용객들은 운행 편수 부족에 따른 불편을 감수하고, 요금까지 더 지급하는 이중고를 겪게 생겨도 아무 말이 없는 새정치민주연합이다.

호남고속철도를 건설한 근본취지는 수도권과 호남권을 신속하게 연결해 고속철도를 통한 사회경제적 파급 효과를 확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부는 KTX경부선 개통 이후 10년 동안 상대적 박탈감을 견디며 서울-광주 고속철 개통을 염원해 온 호남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기 바란다. 그동안 겪은 호남차별과 소외의 역사 속에서 호남이 견뎌온 인내심을 다시 실험하지 말기 바란다.

얼마 전 전북도의회 의원 일동은 성명서를 내고 ‘550만 호남인들과 함께 서대전 경유 계획이 철회될 때까지 지역의 명운을 걸고 맞설 것이며, 투쟁까지 불사하겠다’고 천명했다. 서대전을 경유할 경우 전북도에서 서울까지는 4분밖에 단축되지 않는 현실이고 보면 화가 날 만 하다.

정부는 서대전역 경유 문제를 2월초에 최종 결정한다고 한다. 광주·전남·전북 국회의원을 비롯한 지방정치인은 전북도의회가 천명한 것처럼 호남고속철 원안 운행에 명운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밖에 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의 문재인 의원은 그동안 호남에 진 빚을 생각해서라도 이 문제를 푸는데 가장 앞장서야 한다.

잘 알다시피 ‘비 내리는 호남선’은 한국 현대사에서의 호남 차별과 소외의 상징이었다. 이제 그 굴레를 벗고 부산과 광주에서 동 시간에 출발하면 광주사람이 먼저 서울에 도착하는 시대를 살고 싶다. 제발 그 열망을 저버리지 말라.

지금 호남은 ‘호남고속철 지키기’에 온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주필·이사 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