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픈 日帝 수탈의 흔적이 근대건축물로 남아있고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군산 구불길(달밝음길)’ kjdaily.com

2015년 01월 29일(목) 19:27

은파호수를 등지고 걷는 숲길. 월명호수로 이어지는 이 길은 군산시민들이 즐겨찾는 산책로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광주에서 부안을 지나 김제 땅에 다다르니 호남평야가 드넓다. 일제는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하기 위해 호남평야와 맞닿아 있는 군산을 전진기지로 삼았다. 군산이 일제에 의해 산업화되면서 수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축조됐다. 그 때 지어진 건축물들은 일제에 의한 수탈의 상징물로 남아 있지만,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는 근대건축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오늘은 구불길을 걸으며 우리의 뼈아픈 일제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군산을 온몸으로 만나려고 한다. 구불길을 걷기 위해 군산의 남쪽 끝에 있는 은파호수 근처 은파관광안내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은파호수를 등지고 구불 6길로 접어든다. 높지 않은 산줄기는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어진다.

숲속 임도에서는 많은 군산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임도는 월명호수로 이어진다. 월명호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정호수다. 산은 호수를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고, 호수는 산봉우리들이 물위에서 즐길 수 있도록 배려를 한다. 그래서 산과 호수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 같다. 월명호수는 군산시민의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원래는 군산 제1수원지라고 불렀다. 월명호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도심에 있는 산정호수이다. 지금의 월명호수는 1915년 1월에 만들어졌으니 100살 나이의 인공호수다.

수시탑에서 바라 본 금강과 군산의 풍경. 군산항과 도심, 금강 하구와 장항, 금강 하구둣과 오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점방산과 월명산 비탈을 따라 월명공원길이 이어진다. 아름드리 벚나무 가로수가 우리를 공원길로 안내한다. 이어 삼일운동기념탑과 삼일운동만세상을 만난다. 1919년 군산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고, 후손들에게 민족의 주체성을 길이 간직하라는 의미로 세워진 탑이다.

채만식선생문학비 앞에 선다.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이 고장 출신 채만식은 일제의 수탈에 의해 무너져 가는 고향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채만식의 ‘탁류’는 바로 일제강점기 군산을 중심으로 파멸되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채만식선생문학비에서 내려서니 높은 계단 위에 활활 타오르는 듯한 하얀 탑이 우뚝 서 있다. 군산시를 상징하는 28m 높이의 수시탑이다. 수시탑은 바람에 나부끼는 선박의 돛 모습과 타오르는 불꽃 모형이며 군산시의 번영을 기원하고 상징한다.

수시탑은 탑 자체도 아름답지만 여기에서 내려다보는 금강과 군산의 풍경이 압권이다. 군산항과 도심, 금강 하구와 장항, 금강하굿둑과 오성산이 풍경화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에서 발원해 1천리를 달려온 금강이 더 큰 세계인 서해바다에 자신을 던지는 곳. 그 모습은 강이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바다라고 할 수도 없다.

이제 숲길을 벗어나 일제강점기부터 조성된 군산의 골목길을 걷는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옛 군산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남아 있다. 가장 먼저 만난 건축물은 옛 군산세관이다. 1908년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자재를 수입해 건립됐다. 옛 군산세관은 서울역사, 한국은행 건물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낸 것은 영국의 건축양식이다.

사진 위로부터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의 하나인 옛 군산 세관, 군산의 과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간직한 경원동 철길.

군산세관 옆에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역사박물관에는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해양물류역사관과 1930년대 군산에 존재했던 11채의 건물까지 재현해 놓은 근대생활관 등이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옆으로는 근대의 건축물이 야외전시장처럼 나란히 서 있다. 먼저 만나는 건물은 2층으로 이뤄진 장미갤러리로 2013년도에 보수·복원해 현재는 체험학습과 예술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는 북카페로 이용되고 있는 옛 미즈상사 건물,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일본 제18은행군산지점 건물들이 근대건축물의 역사를 전해준다.

해변으로 나아가니 진포해양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 고려말 최무선장군이 왜선 500여척을 패퇴시킨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진포해양공원을 꾸몄다. 여기에는 육·해·공군에서 사용하다 퇴역한 장갑차·전함·전투기 등 군장비 13종 16대가 전시돼 있다.

진포해양공원을 지나니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한적하고 쓸쓸한 째보선창이 있다. 채만식의 ‘탁류’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도 나오는 째보선창은 옛 죽성포구를 일컫는다. 예전에는 군산 최대의 어판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추억의 공간으로만 남아 있다.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째보선창은 이곳 선창에 째보(언청이)라고 불리는 객주가 있었는데 그가 포구의 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불려졌다고 한다.

째보선창을 지나서 경원동철길로 들어선다. 가난한 서민들이 사는 동네를 지나는 철길은 가옥과 거의 붙어 있어 기차가 다니지 않는 시간에는 주민들의 앞마당이 되고 아이들 놀이터도 됐다. 경원동철길은 1944년 4월부터 2008년 6월말까지 화물열차가 하루에 두 차례 운행됐다. 철길에는 건널목이 많고, 주변에 건물이 워낙 가깝게 붙어 있어서 시속 10㎞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지날 때는 역무원이 기차 앞에 타고 호루라기를 불거나 고함을 질러 사람들에게 대피하도록 했다고 한다.

허름하고 우중충한 잿빛 건물들에서는 서민들의 팍팍한 삶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러한 경원동철길을 걷기 위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풍요롭지만 인정이 메말라버린 현대문명과는 달리 가난하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과거의 모습을 동경하는 발걸음이 아닐까? 그래서 경원동철길을 걷는 여행은 행복했던 과거를 찾아가는 여행이며, 따뜻한 어머니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행이다.

군산 3·5독립만세운동의 시발지인 구암동산을 지나 강변으로 내려와 강변길을 걷는다. 비단결처럼 곱다는 금강이 서해를 만나 바다 같은 강이 됐다. 강물 위에는 서천의 낮은 산들이 배처럼 떠 있다. 바람은 나에게 빨리 걸으라하고, 강은 날더러 천천히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즐기라 한다.

금강하구언도 점점 가까워진다. 강바람에 이끌려 걷다보니 어느덧 진포시비공원에 도착해 있다. 금강에 떠 있던 가창오리들이 강위로 날아오르며 우리를 배웅해준다.


여행쪽지
▶군산 구불길은 군산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탐사할 수 있는 길로, 고군산과 신시도, 새만금을 포함하여 총길이 188.4㎞에 8개 길과 간선 3개 길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군산 구불 6길은 군산의 근대문화와 역사, 자연생태를 두루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길이다. 은파관광안내소(은파호수)-월명호수-월명공원-군산근대역사박물관-경암동철길-구암동산-진포시비공원-군산역까지 15.5㎞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IC → 대야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21번 국도 → 군산대학교 → 은파관광안내소(은파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