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는 자는 몰락하리라! 해와인문기획 시네필로 ‘화장’과 욕망 kjdaily.com

2015년 04월 15일(수) 20:16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기획으로 격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해와자유대학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뒤돌아보지 말라!”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옥으로 간 오르페우스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주문이었다. 성경에서 롯의 아내는 유황불로 뒤덮인 소돔에서 탈출하다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됐고, 전설 속 며느리는 홍수가 난 마을에서 벗어나 언덕을 오르다 살려달라는 시아버지를 돌아보다가 바위가 됐다. 오르페우스 또한 에우리디케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하려다가 다시 그녀를 잃고 자신도 곧 죽음에 이른다.

영화 ‘화장’의 오상무도 요 근래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잦다. 유명 화장품 회사에서 마케팅 부서의 중역인 그는 곧 부사장으로 승진한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뇌종양이 재발해 큰 수술을 받는다. 오상무는 업무가 끝나고 나면 고단한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가 정성을 다해 아내를 간호한다. 그런 그의 앞에 홍보팀에 새로 입사한 추은주 대리가 나타난다. 아내가 점점 죽어갈수록 그녀를 몰래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짙어져만 간다. 회식이 있던 날 추은주는 와인을 마시며 중후한 맛이 일품이라고 칭찬하고는 상무님에게 어울린다며 선물한다. 2차를 가는 사원들을 뒤로하고 병원으로 향하는 오상무는 뒤를 돌아 그녀의 얼굴을 찾는다. 어쩐지 이쪽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만 같은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환영처럼 어른거린다. 추은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싫어 지방 출장을 간 그는 연극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관람한다. 붉은 조명 아래 넘실대는 에우리디케의 영혼은 그에게 추은주의 유혹적 환영으로 대체된다. 급기야 추은주를 향한 그의 욕망은 아내와의 섹스마저 그녀의 나체 환상으로 얼룩지게 한다.

오상무의 에로스적 욕망은 동시에 타나토스(죽음)에의 욕망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그는 추락하고픈 욕구를 느낀다. 성공을 위해 앞만 바라보며 달려왔던 그였다. 하지만 늙고 병든 육체는 그가 이제껏 이룬 업적을 조롱한다. 그는 회사에서 여러 사원을 거느리는 능력 있는 임원이지만, 회사 밖에서는 바지 속에 오줌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전립선 비대증 환자일 뿐이다.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병든 육체는 세상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욕망, 곧 죽음에의 욕망을 꿈꾸게 한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인 장례 행렬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화려한 상여와 함께 검은 상복의 장례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앞서가던 오상무가 뒤를 돌아 추은주에게 시선이 머문다. 이 장면은 오상무가 아내를 화장시키는 날 머릿속에 떠오른 환상이다. 실제로 장례식장을 찾은 추은주는 단정한 검은 상복을 입고 있지만, 그녀의 속살을 탐하는 그의 욕망은 붉은 옷을 입고 화려한 치장을 한 그녀의 환상을 꿈꾼다. 추은주는 몰락을 예고하는 유혹의 기표다. 생동하는 붉은 젊음을 탐하는 욕망은 곧바로 그의 인생에서 추구해왔던 유일한 목적인 성공을 무너뜨리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 곧 죽음을 욕망하는 일이다.

오상무는 딸의 타박을 받아가면서까지 아내의 유품을 서둘러 정리한다. 그에게 추은주는 아내의 에로스적 대체물이 아니다. 아내와 추은주는 죽음충동이라는 같은 욕망구조에 놓여 있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한 그에게 추은주를 향한 욕망도 남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집에 찾아온 추은주를 피해 슬리퍼 바람으로 도망간다.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위반하면 죽음에 이르리라는 계율은 비단 신화나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은 뺄셈을 모르고 달력이 앞으로만 넘어가듯 뒤돌아보는 자, 과거에 머무르는 자는 도태되리라는 현실의 저주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오상무는 다시 옷을 차려입고 회사 복귀를 준비한다. ‘내면 여행’과 ‘가벼움’이라는 두 개의 기획안 중 가벼움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무거워 보이는 이유다.

/최송아(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