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과 기억 그리고 일상의 정치 최정기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2015년 04월 19일(일) 20:05

20세기 후반기를 흔히 증언의 시대라 부른다.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이 그 시대를 상징하듯이, 또 근대 유럽에서 소설이 시민사회를 상징하듯이, 현대는 증언이 상징적인 장르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껏 역사 속에서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 무명의 사람들, 역사라는 맷돌에 짓이겨진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개인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증언은 곧 기억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기존의 지배적인 역사와 다를 때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열어준다. 특히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사회에서 행해졌던 국가폭력에 대해 기존 국가권력의 주장과 다른 기억은 그 자체로 보다 열린 사회를 향한 투쟁이 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5·18민중항쟁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가 항쟁 피해자들의 사진첩을 만든 것이나 현대사사료연구소가 1990년에 500명 이상의 증언 채록집을 만든 것은 기억의 정치적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해마다 5월에 열리는 광주인권도시포럼에서 전남대학교 5·18연구소가 주관하는 올 해 회의의 주제는 “국가폭력과 기억 그리고 일상의 정치”이다. 국가폭력과 기억의 문제가 일상의 정치와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는 5·18연구소가 국가폭력의 문제를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국가폭력의 양태로 제시한 바 있다. 고전적 의미의 국가폭력이 경찰이나 군대 등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한 폭압적 방식이었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국가폭력은 법질서 확립이나 민영화와 같이 물리적으로는 비폭력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 자체를 파괴하는 지극히 폭력적이라는 것이 논의의 주제였다.

올 해는 광주와 유사한 아픈 경험이 있는 대만 까오숑시와의 지역 간 비교를 통해 광주경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파악하려고 한다. 까오숑시는 1948년의 2·28사건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1979년 미려도(美麗島)사건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두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상호 교류의 기회로 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5·18민중항쟁 35주년이 되는 올해는 항쟁을 상징하는 핵심공간의 하나인 옛 전남도청이 아시아문화전당으로 개관하는 해이다. 그런 만큼 기억투쟁과 일상정치에 주목하는 이번 주제회의가 인권도시로 거듭나는 광주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