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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통 난 죄’와 ‘들통 나지 않은 죄’

<본사 사장>

2015년 04월 22일(수) 20:31

최근 광주의 한 기관장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완구 국무총리 사퇴 소식을 접했다. 그 기관장의 첫 마디는 ‘들통 난 죄’라고 했다. 정치인 누구나 다 저지르는 죄인데 들통 나는 바람에 자리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 말 뒤에는 대부분 정치인이 이완구 총리만큼의 죄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들통 난’ 정치인 대부분이 처음에는 완강하게 부인하고 억울하다고 호소하다가 증거가 나오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왜 나만 갖고 그래’ 식이다. ‘다른 애들도 다같이 도둑질 했는데 왜 나만 감옥가야 돼냐’고 항변하는 식이다. ‘모두가 다 죄인인데 억울하게 나만 재수가 없어서 당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들통이 나도 뻔뻔하게 대처하고 거짓말 먼저 하고 본다.

비리가 불거져도 ‘죄’가 아니라 ‘재수가 없는 것’이 한국 리더계층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이고 보면, 정치권 전반에 온존하고 있는 돈에 관한 음습한 관행은 이제 비리나 부패 수준을 넘어 한국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들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정치인을 꼽는다. 대학생이 생각하는 가장 부패한 직군도 정치인이다.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이 전국 20대 대학생 모바일패널 504명을 대상으로 검사, 고위공무원, 기업인, 대학교수, 정치인, 초중고 교사 등 6개 직업별 청렴수준 인식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정치인은 5점 만점에 4.6점으로 가장 부패한 직군으로 평가됐다.

얼마 전 세계 주요 27개국 정부와 기업·언론·비정부기구의 신뢰도를 매긴 2015 에델만 신뢰 바로미터 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여기서 한국의 기업 신뢰도는 조사 대상국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고, 정부 신뢰의 경우 멕시코와 공동 바닥권인 20위에 그쳤다. 대부분 법규와 윤리적 가치에 위배되는 뇌물, 향응, 청탁, 이권개입 같이 우리 사회를 오염시키는 행위들 때문이다.

홍콩 정치경제리스크컨설턴시(PERC)의 ‘2015 아시아·태평양 국가 부패인식’ 보고서는 ‘한국은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 최악의 부패 인식을 갖고 있는 특별한 국가다’고 단정할 정도다. 외국 기업인들도 한국부패의 주요인으로 정치권과 기업의 유착, 권력·고위층의 특혜 시비 등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국무총리까지 사직하게 만든 ‘성완종 사건’은 정경유착, 정치인 신분을 이용한 관가·금융권 로비, 쪼개기식 편법 후원 등 정치권의 ‘부패 종합판’을 잘 드러낸 사건이다. 그동안 ‘관행’이라는 이유로 묵인되고, 방치되었던 우리사회 한켠에 자리잡은 부패문화는 우리 시대의 가장 고통스런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준 대목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정치부패는 더 숨기거나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 그냥 놔두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일부 공직자와 사회지도층의 뇌물수수, 향응, 탈세, 청탁, 압력행사, 부동산투기, 불건전한 재산증식, 이권개입, 학연지연 챙기기, 병역기피···. 보통 국민들을 얼마나 절망시켰는지 아는가.

정치는 국가시스템의 가장 상층부에 위치하고 있다. 정치가 안정되거나 선진화되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지속 될 수밖에 없고 성장도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도층과 국민 사이에 신뢰가 깨지면 그 국가는 혼란에 빠진다.

그동안 지구촌 어떤 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지도자와 국민을 갈라놓는 가장 큰 요소가 ‘부패’임을 알 수 있다. 부패한 지도자를 따를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 모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한국의 정치부패 회오리 바람은 계속 될 것이다.

이 시간에도 한국 정치인들은 이완구 국무총리를 동정하며 ‘들킨 게 죄’라고 위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 자체가 부패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권력으로 잇속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 특권 의식이 곧 부패를 부른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부당하게 남용하는 특권은 필연코 부패로 연결된다.

정치부패는 국가와 조직은 물론, 개인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최대의 적이다. 과거 수천 년 역사상 많은 왕조가 결국은 부패로 멸망했다. 권력자에게 부패 문제는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다. 권력의 불꽃을 향해 부패의 불나방이 끊임없이 날아든다.

권력은 민심의 바다 위에 뜬 배에 비유된다. 바다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가라앉게도 만든다. 언제 변할지 알 수 없고,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 민심의 바다이다. 우리는 지난해 이맘때 진도 앞바다에서 300여명이 넘는 목숨을 잃었다. 그때 그 바다에 대고 우리가 다짐한 바는, 상식과 원칙을 벗어난 이 사회의 부정, 부패, 부조리, 안전불감증을 싹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분노와 절망의 바다 1주년에 우리는 다시 정치부패의 추악한 뒷면에 절망하고 있다.

지금 ‘들통 나지 않은 죄’로 안심하고 있는 정치인들, 들통 날 일 자체를 만들지 말라. 정치나 권력은 깨끗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