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에 대한 별난 인식 김한필 |
| 2015년 05월 17일(일) 19:19 |
|
한 중앙 일간지에 지난달 ‘이젠 한자 의타주의를 버리자’라는 제하에 기고문이 실렸다. “교육부가 지난해 9월 고등학교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에 관한 법률안을 확정하면서, 이것과 상관없는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 방안’을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이 기고문을 읽으면서 기고자가 과연 한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숙고해 보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고의 결론부터 보면 “교육부는 초등 교과서에 한자병기를 실시하기 보다는 그 한자어에 알맞은 맨 우리말을 지어서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교육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교육부 아닌 어느 엘리트집단이라 해도 그 많은 한자 어휘들을 무슨 재주로 우리말로 짓는단 말인가!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분들의 의견이 있고,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의 견해가 있긴 하다. 국한문 혼용론자들은 한국어 어휘의 약 70% 가량이 한자어라고 주장한다. 반면 한글 전용론자들은 고유어 54%, 한자어 35%, 외래어가 2% 가량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한자어나 고유어가 차지하는 비율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한자어가 최소한 20% 이상만 된다면 한자어를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국어는 일시에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우리 국어는 고래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서양문물을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번역한 서양언어들을 그대로 수용해서인지 한자어가 유독 많은 게 현실이다. 특히 법률용어는 그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이런 우리 문화가 일시에 바뀔 수도 없으려니와 굳이 억지로 바꾸려 해서도 안 된다.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언어문화도 자연스럽게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지 정부의 의도나 정책에 의해서 단번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 기고자는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은행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는 은행에 한 번 갔다 오면 은행이 무엇인지 알지만, 은행에 가보지 않고 ‘은 銀, 갈 行’하며 한자로 은행을 가르쳐봐야 은행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이처럼 학습이해도는 보고 듣고 느끼고 부딪치면서 높아지는 것이지 한자를 알아야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자를 쓰면 우리말로 풀이하는 과정이 하나 더 늘 뿐이다”고 했다.
이런 비논리적인 주장이 어디 있는가. 그럼 은행을 한글로 무어라 지으면 아이들이 가보지 않고도 은행이 하는 일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좋은 우리말 단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자어로 은행(銀行)에는 은행의 유래나 역사가 담겨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한자어에는 그 자체로 심오한 의미나 유래, 역사를 담고 있는 단어들이 많다.
두 가지만 더 기고자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한자는 뜻글자여서 사고력을 높여준다고 하는 주장도 근거 없는 말이다. 과학문명이 어디가 더 발달했으며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유럽의 수준 높은 철학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소리글자의 나라가 아닌가? 소리글자도 다 뜻을 가지고 있음을 잊었는가?”라고 말한다. 또 “한자를 모르면 역사와 전통문화가 끊어진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한문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안 나오는 이유를 한자를 안 써서 그렇다고 주장하니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가?”라고도 했다.
이런 주장이 있었는지 여부나 진위도 따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기고자가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 방안’을 반대하면서 이런 소수의견을 인용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또 소리글자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과학이 더 발달하고 수준 높은 철학이 나왔다는 견해에 다소 동의할 수 있지만 이유는 되지 못함을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건 기고자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유어와 한자어를 혼용해 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에 의해서 우리 글자가 만들어 졌으니 우리글로 모든 뜻을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너무 멀리 있다. 오래 전에 ‘이화여자대학교’를 한글로 바꾸면 ‘배꽃 계집아이 큰 배움 집’이 된다는 우스개도 있었다. 우리국어의 많은 어휘들이 한자어로 되어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뜻을 쉽고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한자교육은 지금 당장 필요하며 조기교육일수록 좋다고 본다. 한자어를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을 지어내는 일은 그 다음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현실적 필요에 의해 영어를 주요 교육과목으로 받아들이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