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깊은 물의 생각 본사 사장 nam48@kjdaily.com

2015년 07월 01일(수) 20:36

14일 광주U대회가 끝나면 광주에는 무엇이 남는가. 혹자는 빚이 남는다, 혹자는 영광이 남는다 한다. 필자는 ‘국제도시’와 ‘문화’가 남는다고 본다. 그래서 광주U대회조직위는 오래전부터 ‘컬쳐버시아드’라고 주장했다. 짐작처럼 문화를 뜻하는 ‘컬처’와 ‘유니버시아드’를 합성한 신조어다. 대형 스포츠행사는 개최지의 문화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고 있는 광주의 문화수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기회다. 특히 스포츠 행사에서 금은동 메달스타가 나오듯, 개폐회식과 각종 문화행사를 통해 ‘문화리더십’ 점수를 매겨 볼만하다.

자, 그러면, ‘컬쳐버시아드’ 첫 종목은 뭔가. 3일 지구촌 이목이 가장 집중하는 개막식 문화이벤트다. 광주 탄생 이래 가장 규모 큰 국제행사의 서막 ‘창조의 빛, 미래의 빛’은 금메달일까 은메달일까. 필자는 개막식 축하 공연 리허설을 미리 보고 ‘한글 등 우수한 문화 자산을 바탕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이야기’에 높은 점수를 주면서 고(故) 한창기(1936-1997)선생을 떠올렸다. ‘우리 것’, ‘향토적인 것’의 우수함을 광주정신에 담아 세계인에게 드러내고자 한 개막축하내용이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1970-90년대만 해도 전통문화는 ‘낡은 것’ ‘추한 것’ 취급 받았다. 서구문화가 물밀 듯 들이닥치고 유학파가 정부부처, 문화계를 쥐락펴락 하던 시기에 생각을 되 짚어 ‘우리 것’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면서, 시대 뒷길에 팽개쳐졌던 전통을 살려낸 이가 바로 한창기 선생이기 때문이다.

선생을 생소하게 느끼는 독자가 있을까 싶어 부연하자면, 1970-1990년대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발행인이자 편집자로 활동했던 ‘잡지계 전설’이자 언어학자이다. 폐간되기 전 ‘샘이 깊은 물’에 자주 글을 쓰곤 했던 필자는 이 잡지에 매료돼 호남에서 이런 잡지를 만들어보는 것을 꿈으로 갖기도 했다. 마침, U대회 기간인 4일, 광주 동구청 대회의실에서 ‘도대체 한창기란 사람은 누구일까’ 특강이 열린다고 한다. 특강 하는 이가 박원순 서울시장이어서 의아하긴 하지만 살아생전 한창기 선생과 깊은 인연을 아는 이들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고 한창기 선생을 언급하면서 ‘많은 사람을 접해봤지만 그 보다 더 세상을 잘 읽는 사람은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필자 역시 문화부 기자 시절 한창기 선생을 인터뷰 할 때 ‘생각이 남보다 앞선 사람, 등잔 밑도 꼼꼼하게 살피는 사려 깊은 분’이라고 느꼈다. 인터뷰 말미에 고 한창기 선생은 젊은 기자 남성숙에게 ‘시대를 앞서 나간 이들은 늘 외롭다. 지긋지긋한 편견과 싸우는 시간 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보성사람 한창기는 광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지만 그가 피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타 지인들의 몹쓸 편견과 부당한 따돌림이었다. 그래서 전라도를 태생지로 갖고 있다는 까닭만으로 욕을 먹는 일의 터무니없음과 그릇됨을 또박또박 짚으며 울분을 토했다. 전라도 사람이 타지에서 난 사람보다 더 많은 결점을 갖고 있을 리가 만무한데, 전라도 사람을 표 나게 드러내놓고 차별하는 일은 ‘기침했다고 해서 매를 한 대만 때리고 재채기를 했다고 해서 두 대를 때리는 잘못’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이 시대 서울생활을 하면서 성공한 60,70대 호남사람들은 공감할만한 얘기다.

필자가 광주 탄생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는 광주U대회 개막 하루 전에 한창기 선생 얘기를 꺼낸 이유는 광주가 앞으로 10여일동안 세계에 보여야 할 역량이 ‘컬쳐버시아드’이며 컬쳐버시아드 경기를 뛰는 문화예술인들은 ‘한창기 문화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1976년 한창기 선생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며 ‘문화는 꽃이 아니라 뿌리이고, 정치나 경제는 그 열매’라고 말한 바 있다. 문화의 근원적 힘은 한 나라의 명운을 좌우한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근원이 바로 문화다. 문화의 뿌리가 굳건하면 정치·경제·교육·복지 등 모든 게 정상화된다. 지역 갈등이니 소외 같은 문제도 저절로 풀려 국민적으로 큰 통합을 이룰 수 있다. 1985년 시작된 ‘유럽문화수도’가 그것을 입증했다. 유럽 대통합을 기치로 시작된 유럽의 문화수도 프로젝트는 해당 도시민들의 전폭적인 참여와 이웃 도시들과의 교류, 그리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으로 전 유럽의 관심 속에 이어져 오고 있다. 2008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된 영국 리버풀의 경우 연간 15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 중 공연 관람객이 980만 명에 이다. 인구 44만 명에 불과한 리버풀은 문화수도 행사를 통해 쇠락한 공업도시라는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개선시켰다. 현재 리버풀은 비틀스의 고향으로 수많은 문화유산과 스토리를 보유한 문화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그 결과 1조3660억원에 달하는 경제효과까지 더해지며 문화수도 사업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자, 이제, 광주 컬처버시아드도 개막됐다. 광주문화예술계 컬쳐버시아드 선수 뿐 아니라 시민 관객도 세계 문화수도 메달 경쟁에 돌입했다. 이왕이면 금메달을 따야 한다. 광주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한창기 선생은 전라도 사람이란 수많은 난관을 뚫고 대한민국 문화 판도를 바꿨다. 한창기 선생의 문화전쟁에 비하면 훨 여건이 좋은 이 시대에 광주가 진정 문화수도 평가를 받으려면, 겉멋을 넘어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문화혁신이 필요하다. 꼭 금메달을 따겠다는 선수의 투지로 컬쳐버시아드 경기를 잘 뛰어야 한다.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