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유지의 비밀, 자발적 복종 해와인문기획 시네필로 ‘간신’과 복종 kjdaily.com

2015년 07월 08일(수) 19:51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기획으로 격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해와자유대학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을 과연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있을까?…. 나는 단지 상식을 가진, 인간의 얼굴을 한 존재에게 묻고 있다. 자기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 타인에게 자신의 평안과 자유, 몸 그리고 삶까지 온전히 맡기고 있는 이러한 삶보다 더 비참한 삶의 조건이 가능할까?”

누구를 향해서 이런 참담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거지, 부랑아, 아니면 병자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다. 이 말은 독재자를 모시는 신하에게 내려진 평가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지식인이었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18세의 젊은 나이에 독재의 비밀을 담은 책 ‘자발적 복종’을 탈고한다. 그에 따르면 독재는 독재자 개인의 카리스마 때문에 탄생한 것이 아니다. 보에시는 독재가 지속되는 결정적 원인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국민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독재자를 보호하는 실체가 무력을 행사하는 군대나 무기가 아니라 그를 떠받들고 있는 신하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들이 영혼을 헌납한 대가로 의식주에는 궁핍함이 없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 이들의 직무는 ‘왕의 쾌락을 위한 동반자’, ‘왕의 애욕을 채우기 위한 뚜쟁이’, ‘왕의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국민의 살림을 약탈하는 공범자’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보에시가 이 책을 구상한 결정적 계기는 당시 프랑스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을 전제군주가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태에 있다고 한다. 보에시가 태어나기 불과 24년 전 우리나라에도 독재가 횡행하고 있었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은 12년이라는 길지 않은 재위기간 동안 두 차례나 사화(士禍)를 일으켜 피의 숙청을 단행한 폭군이다. 국정 감찰을 임무로 하는 삼사(三司)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첫 번째 사화(戊午士禍)를 통해 연산군은 왕권을 확보한다. 하지만 그 권력을 주색과 연회·사냥 등 개인적 향락에 탕진해 오히려 삼사의 재기에 발판을 마련한다. 이에 능상(凌上)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두 번째 사화(甲子士禍) 이후 반정(反正)으로 폐위되기 전까지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쥐고서 극심한 폭정을 펼친다.

영화 ‘간신’은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광기로 얼룩진 연산군에게 기생해 권력을 잡으려는 임사홍·임숭재 부자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음탕한 생활에 젖어 있던 왕은 전국의 아름다운 여성 1만 명을 색출해 왕에게 바치겠다고 속삭이는 이들 부자에게 채홍사(採紅使)라는 새로운 이름의 벼슬을 내린다. 이들은 연산군의 구미에 맞춰 전국의 기생 뿐 아니라 양반의 첩이나 사가의 규수까지 징집해 백성의 원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된다.

독재군주에 눈에 들고자 애쓰는 아첨꾼은 독재군주가 말하는 대로만 하지 않는다. 보에시는 그들이 단순히 복종하는 수준을 넘어 군주의 생각을 미리 알고 준비하며,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본성과 취향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해가면서까지 철저하게 군주의 눈과 손, 발이 되도록 적응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굴종을 통해 쟁취한 재산과 권력은 또한 쉽게 잃는 법이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을 부추켜 갑자사화를 일으켰던 임사홍·임숭재 부자는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재산뿐 아니라 생명마저 잃는다.

보에시가 자발적 복종의 원인으로 본 것은 자유의 망각과 복종의 습관이다. 자본은 오늘날 무엇보다 가장 앞선 가치가 되었고, 국가권력은 그러한 자본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국민의 시야를 미혹시키고 있다. 이들에 맞서 우리 본연의 자유를 기억하고 관습적인 복종에 의문을 제기할 때 비로소 독재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희망이 피어날 것이다.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