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해버린 전설…흘리고, 뿌리고, 발길 가는대로 蓮花의 울림만 남아 박종석 화백의 화필여로 <52>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 연꽃! 까닭없는 울림 kjdaily.com

2015년 07월 15일(수) 18:56

박종석 作 ‘비두랑걸래 산상에서 바라 본 와불’ 시기리아 바위산 아래 와불를 배경으로…. ‘달의 역사’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곳에 특별한 정보도 없이 덜렁 내팽개쳐져 있다면 어느 누구든 처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은 생김새와 언어만 다를 뿐, 마음으로 느끼고 교감하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것 같다.

스리랑카 중부 시기리아 한적한 시골마을 허름한 상점에서 우리 일행들은 짧은 영어로 이곳의 사정을 알아보고 현지 가이드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봉고차를 임대해 이곳 시기리아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기로 한다.

가까운 거리에 보이는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의 형상이 사자가 포효하는 모양이다. 정상에는 시기리아 왕궁이 있단다. 오르는 길에는 1천200계단이 있는데 높이가 200m에, 빨간 진흙 벽돌로 기초흔적을 남기고 있는 왕궁의 터는 3천평쯤 된단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수세기 전, 시기리야가 포함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지역을 통치했던 왕은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 카샤파(Kasyapa)는 천민 여자가 낳았고 왕족출신 차남 목갈라나(Moggallanna)는 둘째 아들이었는데 장남 카샤파는 쿠테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내쫓고 왕이 되면서 동생이 왕위를 넘볼까 두려워 절벽바위에서 성을 축조했다. 그러나 인도로 망명한 목갈라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카샤파 왕을 물리친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친자식이 왕인 아버지를 죽이고 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면서도 두려움 속에 갇혀 지내다가 결국 막시무스 장군의 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어가는 이야기처럼 최고 독재자는 항상 불안에 떠는 것이 다반사인 인간 역사가 아니던가?

우리일행은 전설 같은 역사 깊은 왕궁를 오르지 않고 그 왕궁과 마주 바라다 보이는 비두랑걸래 바위산을 오른다. 초입에 아담한 작은 사원을 보고 나서 오솔길도 없는 가파른 정글숲길은 녹녹하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앞서 인도 한다.

관광객의 출입이 전혀 없는 중턱에 도달하자 거대한 바위가 처마처럼 형상을 한 공간을 만난다. 세월에 녹아든 50여m 크기의 와불(臥佛)이 경건하게 모셔졌다. 흙벽돌로 축조된 것인데 비가 들치지 않은 일자형(一字形) 토굴이다. 어느 누구도 봐줄 사람이 없는 고요가 흐르는 장소다.

세속을 초탈한 듯 침묵 속에서도 뭔가를 꿈꾸듯이 토불이 누워계신다. 그 옆 모퉁이는 거의 무너져 과거의 흔적만 산재해 있었다. 일행들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한동안 수다로 휴식을 가진 후 옆 숲길을 돌아가는데 조그마한 연못이 보인다. 그곳에는 맑은 물 위에 수초 사이로 연꽃 한 송이가 소담하게 피어있다. 연분홍색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는 정갈스러운 자태가 신성하게 보여 하찮은 식물일망정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듯 품위를 유지한 느낌이다. 진흙 속의 뿌리를 지나 수중을 거치며 가부좌를 틀듯 꽃봉우리를 지상까지 올라와 있다.

연꽃은 삼세(三世)을 거치는 불가(佛家)의 상징으로 늘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연화(蓮花)이기에 까닭 없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일행들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머물게 한다. 함께 오른 봉고차의 기사가 말한다. 이곳은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와불이자 바위 아래에 축조되어서 비바람를 맞지 않아 오랫동안 보존되어온 환경이란다. 또한 외부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단다.

우리의 탐방은 특별한 행운이었다. 잠시 후 길은 없지만 거친 바위 사이사이를 어렵게 올라 정상에 이르니 거대한 바위산이 축구장보다 더 넓다. 옥쟁반처럼 펼쳐져 있어서 온통 녹색정글인 인간하계(人間下界)를 조망한 느낌이다.

시원한 바람이 천상세계에서나 맛볼 수 있는 꿀맛 같다. 조망한 정글 사이로 간간이 집들과 호수가 보이는데 녹색물감을 흥건하게 풀어 놓은 생기 넘치는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느낌이다.

남근을 닮은 시기리야 왕궁 바위산은 사자가 울부짖는 모양으로 이 곳 사람들은 그 산을 신성시하며 그 이름 자체가 이곳 도시의 이름이 됐단다. 철옹산성의 왕궁과 대조를 이룬 우리가 서 있는 비두랑걸래 산은 포근한 어머니의 젖무덤을 닮았다. 곡선의 부드러운 산 정상에는 그 먼 옛날 사원의 흔적인 듯 붉은 흙더미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하산하면서 생각해본다.

오래된 과거는 사라지고 없지만 바위 밑의 작은 연못에 뿌리내린 연꽃은 무언의 청초함을 간직한 채 어리석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주의 별들을 보며 석가모니의 염화미소(拈花微笑)처럼 이기적인 중생을 질책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