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家門)의 대(代)를 잇는 이들의 책무 본사 사장 nam48@kjdaily.com

2015년 07월 29일(수) 19:43

필자는 광주매일신문 6월24일자, 이 칼럼난에 ‘광주은행 김한 행장의 호남혈맥’이란 제목의 칼럼을 쓴 바 있다. 전남 장성의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선생과의 관계를 짚으며 대를 잇는 호남경제의 맥, 호남명문가 후손다운 품격을 요구했었다. 그 칼럼이 나간 후, 김한 광주은행장을 단순히 전라북도 사람으로만 알고 있던 지역민들은 광주·전남과의 역사적 관계를 인식하고 호감을 표시했다. 훌륭한 선조의 후광을 업고 지역사회에 더 큰 기여를 해야 한다는 기대도 내비쳤다.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하거나 대를 이어 같은 뜻을 품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울 것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본에서는 대를 이어 가업을 지키는 이들이 많아서 대를 잇는다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나라 경우는 자신의 고생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며 대 잇기를 말렸었다. 그래서 장인, 특징이 있는 음식점 등 대를 이어 손재주를 되 물림 하는 가계에 언론은 늘 관심이 높다. 그런데 가끔 2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후손들을 만나보면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피하고 싶지만 다시 숙명처럼 돌아온 길’이라고 말한다. 숙명처럼 그 일을 받아들이고 대 잇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최근 ‘봉사의 삶’을 대물림한 최협 전남대 명예교수도 그런 사례다. 1920년 광주YMCA를 만들었던 고 최흥종목사(崔興琮 1880~1966)의 손자 최협(68) 전남대 명예교수가 95년 후에 할아버지 대를 이어 광주YMCA 신임 이사장에 선출됐다. 최협 이사장이 선출됐다는 소식이 지역 언론에 전해지자 원로 언론인 김승규씨가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최협씨가 광주 YMCA 신임 이사장이 된 것은 기존의 이사장들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며 ‘대를 잇는 지역의 가치’를 언론이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 현대사에서 오방 최흥종 목사의 행적과 업적을 잘 아는 원로 언론인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가 지역사회를 위해 어렵게 세운 단체가 100여년 성장해 손자가 그 일을 이어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큰 사건’임에 분명하다.

목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흥종 목사를 기억하는 지역 원로들은 그의 행적을 거의 ‘전설’에 가깝게 얘기한다. ‘오방 선생’으로 통했던 그는 스스로 성욕, 식욕, 물욕, 명예욕, 생명욕을 버렸다 해서 오방(五防)이라는 호를 지어 부르게 할 정도로 욕심이 없었던 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버린 대신, 사회와 국가에 대한 많은 욕심을 현실화시킨 인물이다. 오방은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평양신학교를 들어가 목사 자격을 취득, 북문밖교회 목사로 취임했고 자신의 교회 유치원 건물에서 1920년 광주YMCA를 창설했다. 광주지역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오방은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 조선나병원환자근절위원회 회장, 여수 애양원 원장, 삼애학원 교장, 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에 추대돼 바쁜 생을 보냈다.

오방이 창설한 광주YMCA는 광주의 굴곡진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3·1운동 이후 민족의 자주성을 되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창립된 후 신사참배반대를 계기로 탄압을 받았고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에 의해 폐쇄되기도 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는 수많은 YMCA 인사들이 수습위원, 활동가 등으로 참여하고, 이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등을 위하여 치열하게 활동했다. 광주YMCA 95년사는 단순히 광주YMCA의 역사가 아니라, 광주 기독교의 역사이고, 민족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운동의 그루터기다.

광주는 올해 탄생 이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을 맞고 있다. 광주가 탄생한 이래 가장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치렀고, 9월에 정부 탄생 이래 가장 큰 문화정책 사업이라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한다. 다시 한번 대전환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한국 현대사 큰 기둥으로 사랑과 정의의 실천자요 봉사자였던 오방 최흥종 선생의 손자 최협 이사장이 광주YMCA를 맡은 것은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소외된 이들의 ‘희망’이었던 할아버지 최흥종의 대를 이은 최협 이사장에겐 21세기 트렌드에 맞는 ‘광주형 사회문화운동 모델’을 개척해 가야 할 책무가 주어졌다.

한국YMCA 이사장을 지낸 윤장현 광주광역시장 역시 광주시 부시장을 지낸 부친 윤지혁씨(92) 대를 이은 ‘행정가 부자(父子)’다. 윤 시장은 부친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행정가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말하곤 했다. 지방자치 이전에 광주시정을 이끌었던 아버지의 흔적을 밟으며 광주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윤 시장은 지방자치 이후 20년 동안 광주시 행정 위상과 수준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 ‘새로운 자치행정의 모범’을 창출해가야 할 의무가 있다.

훌륭한 업적을 대물림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지역의 역사자산이다. 김인후-김연수(삼양사)-김한(광주은행장)으로 이어지는 500년 호남혈맥의 품격, 최흥종-최협(광주YMCA 이사장)으로 이어진 100년 민족운동의 품위, 윤지혁-윤장현(광주광역시장)으로 이어지는 행정의 깊은 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정말 소중한 ‘혈연의 가치’다.

광주가 정말 ‘속 깊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성장해가려면, 대를 이은 이들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사명감을 더 깊이 가져야 하며, 지역민들도 김인후·최흥종·윤지혁씨의 ‘도도한 철학과 뜻’이 후손 김한·최협·윤장현씨에게서 더 넓게 발현되도록 응원해야 한다.

좋은 가풍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자존심을 계승한 이들은 당연히 가문의 자긍심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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