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양심, 양심의 정치 본사 사장 nam48@kjdaily.com

2015년 08월 05일(수) 18:24

93세의 할머니가 지금 평양에 계신다. 5일 평양 길에 오른 이희호 여사의 방북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노쇄한 몸을 이끌고 양쪽 부축을 받을 정도로 다리에 힘이 없는 할머니가 조국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 먼 길 나서는 모습은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저러다 북한에서 돌아가시면 어쩌나 걱정되는 나이에 기어이 작정하고 행동한 데는 ‘마지막 사명’이라는 뜻이 담긴 것 같다.

올해는 6·15공동선언 15주년, 8·15광복 70주년 되는 해인지라 연초부터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됐다. 어려운 상황에 남과 북을 이어줄 신뢰의 끈이 되고자 나선 구순이 넘은 노(老)여사는 조국의 ‘평화’나 ‘통일’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정치지도자들에게 회초리를 든 셈이다.

노할머니는 지금 평양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 소신처럼 마지막 역할로 무너진 남북의 신뢰를 재구축할 수 있는 메신저를 다짐할까? 방북 성과가 있든 없든 필자는, 93세 할머니의 ‘행동하는 양심’이 우리 정치인지도자에게 보여준 메시지가 훨씬 크다고 본다.

이희호 여사의 현재 대한민국 직함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다.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을 널리 펼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이희호 여사의 오랜 정치 동지였던 김대중 전대통령은 호남의 상징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직접 써서 마음에 새겼던 ‘대통령 수칙’중에는 ‘국민의 애국심과 양심을 믿자’라는 다짐이 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권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힘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김대중을 일으켜 세운 것도 국민이었다.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남북정상회담도, 노벨상 수상도 아니라고 본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실천하고 희생한 그의 발자취가 바로 오래도록 빛날 유산이다. 아마 이희호 여사는 지금 평양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며 끈기 있게 세상을 바꾸어 나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의 좌우명이었던 ‘행동하는 양심’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김대중 전 대통령 살아있을 당시 가장 활발했던 ‘호남정치’란 말이 다시 이슈로 떠오른 지금, 이희호 여사의 평양 방문 모습을 보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혁신 카드를 내놓고 거대한 권력암투 중인 거대야당은 지금 만들고 있는 개혁안이 자신들을 위한 개혁인지 국민에게 신뢰를 받기 위한 개혁인지 진단이 가능한가. 오히려 어정쩡한 혁신안으로 당원 탈당이 이어지고 신당 창당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상황에서 120여명이나 되는 국회의원 중 어느 누구도 ‘행동하는 양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에 눈길이 더 간다.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김태호 의원을 보면서, 그 저의와 배경이 따로 있을망정, 이 시대 정치인이 해야 할 가장 솔직한 얘기를 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3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정치인의 불출마 회견을 읽었지만, 김태호 의원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 반성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자신이 최연소 군수 도지사를 거치면서 몸에 벤 스타의식과 조급증 문제’라고 진단하고 ‘초심은 사라지고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귀가 닫히고 내 말만 하려하고 판단력이 흐려지고 언어가 과격해졌다. 말은 국민을 위한다지만 그 생각의 깊이는 현저히 얕아졌다. 이런 상태에서 다음 선거 출마를 고집한다면 자신을 속이고 국가와 국민 지역구민께 큰 죄를 짓는 것이다’고 털어놓았다. 나중에 어떻게 말을 바꿀망정, 대한민국 모든 정치인이 해야 할 반성이라고 본다. 이어서 ‘전 세계가 문을 열어놓고 무한경쟁을 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민국 국민이 살아남으려면 정치도 진정한 실력과 깊이를 갖춘 사람이 해야 한다. 공부할 기회를 갖겠다’고 고백했다. ‘정치 쇼’라 할지라도 왜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이런 고백과 참회를 통해 국민 마음을 사려고 하는 이가 없을까. 조국 서울대 교수는 ‘우리는 이미 지고 있다. 쇼라 할지라도 쇼에도 지고 있다. 너도 나도 답답하다. 그래서 국민이 답답하고 대한민국이 답답하다’고 밝혔다.

정말 답답하다. 새정치민주연합보다 더 부패한 정당이라고 알고 있는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무능정치’를 인정하고 ‘기득권 내려놓기’를 자백해 국민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데 말로만 혁신, 혁신, 하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새정치민주연합을 국민은 뭘 믿고 지지하겠는가. 최근 모노리서치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새누리당은 46.2% 새정치민주연합은 15.5%로 나왔다. 국민 20% 지지도 얻지 못하는 제1야당에서 반성문 쓰고 책임지겠다는 사람 하나 없다면, 자신들이 국민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참회하는 이가 없다면, 끌끌 혀를 찰 수밖에 없다.

김대중·이희호 크기의 ‘행동하는 양심’은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내 정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왜 국민은 야당 정치를 외면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야당 내부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자신의 문제를 똑바로 진단하고 공개적으로 반성, 용서를 빌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을 기대한다. 특히 호남 정치인들 중에도 ‘제2의 김태호’가 나오길 바란다. 나와서 ‘국민을 보지 않고 권력에 집착했다. 호남 대의정치를 망각했다’는 진솔한 반성을 해야 한다.

올해는 정당정치 도입 70년째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럼에도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을 위한, 정치인에 의한, 정치인만의 정당, 싫다. 정치인도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다. /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