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소리, 타자의 얼굴 해와인문기획 시네필로 ‘타인의 삶’과 타자 kjdaily.com

2015년 09월 02일(수) 20:36

통일 이전 동독에는 서독과 이를 비호하는 서방세력의 적대행위를 방지해 국가 안보를 수호한다는 목적으로 슈타지라는 국가보안조직이 있었다. 통일 전까지 40년 동안 활동했던 슈타지는 국경 경비, 해외정보 수집, 대외 공작 등 국가바깥의 적에 대한 대응뿐 아니라 내부의 반체제인사에 대한 감시와 탄압도 행했다.

61년 이후 슈타지의 활동영역은 TV, 라디오, 신문과 같은 보도매체와 문학, 연극과 같은 예술영역으로까지 확산됐다. 또한 76년 이후 냉전체제가 완화되고 제한적 해외교류가 가능해지면서 구성원에 대한 폭력적인 통치방식이 국외로 폭로될 위험에 놓이자, 슈타지는 물리적 폭력대신 도청과 감시, 비밀수색 등을 동원한 ‘심리적 테러’라는 우회적 방식으로 구성원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영화 ‘타인의 삶’은 국가의 유지라는 명목아래 개인의 자유를 말살했던 이 시기의 사회 실태를 여실히 재현한다. 영화의 주인공 비즐러는 슈타지의 요원으로, 대학에서 고문 기술에 대해 강의를 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문화부장관은 경찰국장에게 반체제 예술가를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국장은 비즐러에게 희곡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긴다. 비즐러는 곧바로 드라이만의 집안에서 나는 소리와 통화내용을 도청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 매일 그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즐러의 귀에 들리는 것은 체제 전복에 대한 음모가 아니라 예술과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모습들뿐이다.

드라이만은 작품 활동 금지를 빌미로 그를 위협하는 장관에게 ‘예술을 대할 때는 정치를 잠시 잊어줄 수 없느냐’고 묻는 순수한 예술가다. 게다가 문화부장관이 드라이만을 감시대상으로 지목한 속내가 드라이만을 몰락시켜 그의 연인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즐러는 점차 드라이만과 연인 크리스타가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순수한 사랑에 감화된다.

그러던 중 사회 참여적 성향으로 모든 작품 활동을 금지당한 작가 알버트가 국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드라이만은 그가 남긴 ‘착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라는 악보를 연주하며 연인과 슬픔을 나누고, 비즐러는 그 소리를 도청하며 눈물짓는다.

비즐러는 정의로운 국민이었지만 착한 사람인 적은 없었다. 그의 고문방법은 반동분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는 효과적이었지 몰라도 강의를 들은 학생이 평가했듯 ‘비인간적’이었다. 그런 그가 크리스타로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주어진 임무로 그녀를 대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녀의 아픔에 오롯이 공감하고 참여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철학체계에서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두었다. 그의 사상은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쟁포로를 지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레비나스는 현대사회의 문제가 존재론을 근간으로 형이상학을 구축했던 철학전통에 있다고 본다. 그는 ‘주체의 자율성’이라는 전통철학의 이상을 의문시하고, 타자의 다름, 차이, 이질성에 주목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파악할 때 비로소 윤리학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비즐러는 그동안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타자의 낯설음을 용납하지 않았던 냉혈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엿들으며 레비나스가 ‘얼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 곧 타자를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기꺼이 떠안는 책임이라는 윤리적 관계로 파악하는 경험을 한다. 윤리적 양심을 지킨 대신 임무에 실패한 비즐러는 우편물 검사원으로 강등되고, 통일 이후에도 우편배달부로 초라하게 살아간다. 드라이만은 이 모든 사실을 통일 이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비즐러가 그러했듯 먼발치에서 그를 응원한다. 그는 ‘착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써 비즐러에게 바친다. 책을 포장하겠냐는 점원의 말에 “아니오, 나를 위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비즐러의 얼굴에 양심을 지킨 개인의 존엄이 빛을 발한다.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기획으로 격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해와자유대학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